교동이란 이름에는 옛날 향교가 있었던 동네라는 뜻이 있다. 또한 교동시장은 6'25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쟁으로 피란 내려온 사람들은 대구역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교동과 동문동 일대에 임시 수용소가 많았고, 그들은 생계의 수단으로 교동지역에 상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주변 건물과 도로변에서 미군부대 PX(군대 내 상점)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팔기 시작함으로써 '양키시장'으로 불렸다. 그 당시 보급용 PX 물건을 내다 파는 것은 위법이기 때문에 단속이 있으면 문을 닫고 피해 달아나곤 했었다. 그래서 '도깨비시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1956년 '교동시장'으로 정식 허가를 받았다. 보따리 무역, 탈세 수입품, 미군부대 물품 등을 취급하면서 수입품 시장으로 성장하였다. 다닥다닥 붙은 가게에서 갖가지 수입물품을 중심으로 전자'전기'의류'음식'귀금속 등속의 상권이 넓게 형성돼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시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알음알음으로 단골 손님들도 많았다.
그러나 수입 자유화 여파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전자'전기'수입품을 취급하는 가게와 백화점은 개점 휴업 상태에 있다. 그러다가 젊은 인구의 이동이 늘어나면서 컴퓨터와 귀금속을 취급하는 가게로 탈바꿈하면서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다.
근래 이곳에는 귀금속 거리가 생겼다. 이른바 '주얼리 거리'(Jewelry Steet)로 불리는 이 거리는 교동시장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다. 지역 내 금은방은 계속해서 줄어드는 가운데 교동시장에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게 인테리어를 새롭게 꾸미고, 수리 전문점'귀걸이 판매 전문점'배달 전문업체 등으로 전문화함으로써 고객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시장 주변에는 명소가 많았다. 대구 빵공장의 전설 같은 존재인 수형당(1946년 개업), 대구 최초의 예식장이었던 대구예식장(1952년 개업), 60여년의 역사를 가진 강산면옥(1958년 이전개업), 혼수 준비의 명소인 주단거리(현재 10여개 업소), 도너츠로 유명했던 공주당(1970년대 초 석탑베이커리로 개업), 그리고 1972년 문을 연 동아백화점이 이용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동아백화점의 모기업은 건설업체인 화성산업이다. 화성산업이 1971년 동문동의 교동상가아파트 공사를 하다가 건축주의 부도로 건축물을 떠맡게 되었고, 1970년 설립된 동아슈퍼체인 23개를 흡수해 백화점을 열었다. 그 뒤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했고, 볼링장과 패스트 푸드 가게가 들어섰고, KBS의 오픈 스튜디오가 들어서면서 고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대구역 동쪽에 새벽에만 번개같이 열리는 시장이 있었다. 이름하여 '번개시장'이다. 왜관'신동'경산'하양'영천 등지에서 보따리를 이고 지고 경부선과 대구선 완행열차로 대구역에 내려 새벽장을 보았다. 이른 아침에 물건을 내다 팔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려는 시골 사람들의 인심은 넉넉했고,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해장국 솥 주변에 둘러서서 인정을 나누던 정겨운 시장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상설 시장이 되어버려 아쉬운 마음 그지없다. 옛 정취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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