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사 정현주의 휴먼 토크]TV 고장, 그 이후

수년 전 홈시어터의 열풍이 불어 닥칠 무렵 LCD'PDP 등의 어려운 전문 용어를 공부하며 HD방식의 고화질 해상도를 가진 대형 TV를 구입했다. 어릴 적 TV를 처음 사던 날, 천지가 개벽하듯 충격적이었고 흑백에서 컬러 화면을 가진 TV로 바뀌던 날은 장님이 눈을 뜨듯 획기적이었다. 그런 날들과 함께 64인치 대형 TV를 설치하던 순간도 가정의 TV 변천사에서 획을 긋는 날로 기억되고 있다.

그즈음 문화나 예술을 중시하는 지식층에서는 TV가 주는 해악을 열거하면서 '바보상자'로 규정짓고 'TV 보지 않기'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신문에는 TV가 사라진 거실 한쪽을 책장으로 꾸민 가정들이 소개되고, TV 없이 지내는 일상을 즐거운 표정으로 인터뷰하는 가족들의 사진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기도 했다. 앞서가는 부모는 있던 TV도 없애며, 면학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런 와중에 나는 과감히 벽 한면을 차지하는 대형 TV를 구입하고 밤낮으로 보면서 좋아했다. 거울같이 매끈한 여배우 얼굴의 모공이나 잡티까지도 세밀하게 다 들여다보이는 고화질의 TV를 보면서 미녀들에 대한 환상을 깨고 위로를 받았다. 돌비 시스템의 5.1 서라운드 음향으로 전해지는 '라이언 일병구하기' 영화는 마치 내가 2차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인 오마하 해변에 있는 것처럼 현장감이 있었다.

아들들이 고학년이 되면서 우리 가족도 서서히 이 대형 오락물에 대한 의존도가 줄고 큰 덩치가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러워졌다. 벽면 한쪽에 고립무원의 이방인처럼 우두커니 서있는 모습이 처량하기까지 했다. 이런 우리의 속내를 읽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TV가 잘 켜지지 않거나 시청 도중에 저절로 꺼지는 등 오작동이 나타났다. 그래도 주말이나 여가시간에는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한 레저용품이었던 만큼 처음에는 꽤 답답했다. 특히 막내아들 녀석은 좋아하는 예능프로 시청 도중 TV가 꺼지자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고장 수리를 종용했다. 그러나 급한 일이 아니니 차일피일 미루다가 급기야는 아예 켜지지 않는 시점까지 도달했다. 이참에 우리도 고상하고 격조있게 TV를 안 보는 의식있는(?) 가정이 되면 어떨까 하고 가족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의외로 반발이 심하지 않았다. 고교 3년생 아들은 무관심, 남편은 아쉽지만 찬성이고 막내의 저항이 다소간 있었지만 다수결로 밀렸다. 그 후 사소하지만 서서히, 그러나 부드럽게 우리 가족의 일상이 변화하고 있다.

형광등이 꺼지면 어둠속에서 아름다운 별빛을 느낄 수 있고, 은은한 달빛을 바라볼 수 있듯이 TV가 사라지고 조용해지자 가족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눈길이 분주한 TV모니터가 아닌 평온한 상대방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가족들의 관심이 TV에 출연한 연예인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이웃이나 가족에게로 향해가고 있는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찾던 막내아들도 몇 번 좌절을 느낀 후 이제는 신문을 집어 든다. 나도 퇴근 후 여가시간에 연속극을 보는 대신 책을 들거나 운동을 하게 됐다. 점점 가족들이 고상(?)해지는 것 같다. 언제까지 TV 없이 품위 있게(?)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느 날 '지름신'이 내려와 온 식구가 전자제품 대리점으로 출동하는 날이 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견딜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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