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에 막 발을 내딛은 기분이다. 경남 합천 쌍책면 하신리 정재춘(51)씨의 작업실에는 1m 70cm 크기의 은행나무로 만들어진 민스크호가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160분의 1 축소모형이다. 군함 위에는 커다란 러시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장착된 차량이 보인다. 차량으로 이동 가능한 러시아의 핵탄두미사일은 미국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존재.
민스크호 위 4cm 크기의 트럭. 앞 범퍼가 열려 있다. 안에 엔진까지 선명하게 들여다보인다. 차량의 창문은 콜라병 조각을 구워 만들었고 미션(기어상자), 클러치는 물론 윈도 브러시까지 갖추고 있는 완벽한 차 모양새다. 바퀴 문양도 선명하다. 곧바로 달려갈 듯 정교하고 생동감있게 만들어진 것은 이 트럭만이 아니다.
민스크호에 장착된 레이더망은 머리카락 굵기의 대나무를 엮어 만들었다.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그 정교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돋보기를 통해 봐야 제대로 배의 모든 모습을 볼 수 있다. 민스크호는 정씨가 6년째 매달리고 있는 작품이다. 배 이름은 독학으로 연구한 철제은평상감기법으로 새겨넣었다.
돋보기를 끼고 봐야 하는 극세공예로 28년간 함선을 만들어온 정씨는 놀랍게도 육안으로 그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작업장에는 0.3mm 구멍을 뚫는 드릴이 있다.
"제 작품에 접착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아요. 접착제를 쓰면 깨지기 쉽거든요. 대부분 구멍을 뚫어 나무를 끼우죠."
설명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배의 난간까지도 일일이 구멍을 뚫고 머리카락 굵기만한 나무를 끼워 넣어 만들었다.
보이는 부분 뿐만이 아니다. 잘 보이지 않는 바닥, 함선의 구석진 곳까지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배의 천장 배관까지 완벽하다.
그래도 민스크호는 운이 좋은 편이다. 옛 소련이 미 해군력에 대적하고자 내놓은 3만5천t급 1번함 민스크호는 재정 악화로 1995년 고철로 한국에 수입됐다. 정씨는 해군의 협조로 촬영 인가를 받고 민스크호에 직접 올라 샅샅이 사진과 비디오로 담았다.
노브로시스코호의 경우는 정씨가 흑백사진 7장만 보고 만들어낸 작품. 흑백사진을 놓고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해 함선을 완성했다. 스스로도 "간이 커서 만들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들을 통해 해군참모총장배 모형함선경연대회에서 금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1mm의 예술'인 그의 작품과 열정은 수행자의 그것과도 같다. 그는 군대 제대 이후 이것 외에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
생계를 위해 공사현장에서 목수로 잠깐 일하는 것이 전부다. 그의 한 달 생활비는 15만원. 전기세 4만원, 전화비 4만원을 빼고 나면 7만원이 남는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생활할 지언정 이 작품에 대한 열정만은 놓지 않는다. 오로지 '작가 정신'으로 수도승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우개로 조각하고 도장 파는 것을 좋아했어요. 손재주가 있었는지, 친구들이 신기해할 만큼 잘 만들어냈죠. 집중력이 뛰어나기도 했고요."
그는 해군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함선에 매료됐다. 함선은 당대 과학과 예술의 총집합체. '시대에 이만한 예술품이 있을까'싶었다. 제대 후 본격적으로 함선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규모도 크고 정교한 작업이지만 그는 사실 배 만드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오로지 독학으로 만들어냈다.
이 작업은 무척이나 고독한 작업이다. 합천 한 폐교에 작업장을 마련한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홀로 작업에 몰두한다. 전국에 나무 극세공예가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최고 경지의 기술력이 필요하지만 돈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껏 단 한 점의 작품도 팔아본 적이 없다. 그의 고집과 열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모든 것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단련되어진다. 그는 공사장에 일하러 나가면 최고 목수 대접을 받는다. 목수로 나서도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는 함부로 일하러 나가지 않는다.
"작품 때문에 인생에서 버린 게 얼마나 많은데, 목수일을 하는 데에 시간을 쓰겠습니까. 사람 많은 곳에서 일하고 나면 한 두 달은 작업을 못해요. 물방울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정신이 맑아져야 작품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칼날같이 벼러진 작가정신으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익숙해진 근검과 절제가 아니면 이런 극세공예를 할 수 없다. 맑은 눈을 위해 육류도 멀리 하고 채식을 한다. 폐교 운동장에 돋아난 풀들이 그의 반찬들이다.
외국 함선은 군사 기밀에 해당하는 것들이 많아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사진 자료를 통해 그 내부까지 짐작해야 한다. 하나의 작품을 위해 그는 수백, 수천 번 스케치하고 만들고 분해한다. 치밀한 계산 끝에 만들어도 오차가 생기기 마련. 그의 작업실엔 기껏 만들고도 크기가 맞지 않아 버려진 부품들이 많다. 사다리'자동차바퀴'스피커'도르레…. 워낙 정교한 작업이기 때문에 단 1mm만 차이가 나도 그 부품은 버려야 한다.
오로지 한길로만 정진해왔다. 10년쯤 작업하고 나니 '내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30여년. 강산이 세 번 바뀔 동안 그의 손에서 나무가 떠나는 날이 없었다.
이제 그는 이 분야에 있어 최고를 자부한다. 손재주라 하면 절대 뒤지지 않는 한국인이기에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다. 아니, 전 세계가 깜짝 놀랄 기술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주지 않는다. 마니아들에겐 이미 유명한 공예가이지만 말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조선 강국입니다. 외국인들에게 이런 작품을 보여주면 우리 손기술을 얼마나 신뢰하겠습니까. 조선소 로비에 극세공예로 만들어진 함선을 전시한다면 아마 그 효과는 몇 배가 될 겁니다." 2012년 바다를 주제로 열리는 '여수세계박람회'에도 전시를 하고 싶다. 지금까지 완성한 뉴저지호, 미조리호, 노브로시스코호, 민스크호, 각 나라의 헬기들만 해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전시를 할 수 있다.
그는 민스크호를 완성하면 서울로 가려 한다. "'나'를 알아주고 후원해줄 만한 기업이나 사람을 찾아 나설 겁니다. 조금만 후원해주면 역사적인 작품을 만들 자신이 있거든요."
그는 세계 4대 해전이었던 한산대첩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싶다. 왜선과 우리 배 수십 척을 만들어 그 옛날 이순신 장군이 왜선을 물리쳤던 바로 그 장면을 자신의 손으로 복원하고 싶은 것이다. 여건만 되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미 자료 수집은 마쳤다.
"한 작품을 위해 생명을 바쳤어요. 그러니 모든 작품은 제 생명이고 역사죠."
음악을 사랑하는 그의 작업실 낡은 폐교에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진다. 언젠가 그의 함선들이 그 음악처럼 힘차게 세상으로 다시 항해를 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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