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부]<1> 해월헌(海月軒) 종부 이차야 여사

"속은 힘든 게 종부이니 끝없이 수양해야지요"

시원한 파도소리에 여름이면 많은 관광객이 찾는 울진. 경북 동해안 제일 끝, 울진에 자리 잡은 해월헌(海月軒) 종가를 찾아가는 길을 푸르고 깊다. 오른편으로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7번 국도를 따라 평해읍에 들어서면 평해 황씨 2천년 세거지인 월송'정명리와 기성면 사동이 나타난다. 황락(黃洛)을 시조로 한 평해 황씨 3대본이 이 곳에서 비롯된다. 문하에 이름난 선비가 많이 배출돼 지역의 문화가 크게 변하였다는 뜻으로 세상 사람들이 대해(大海) 선생으로 불렀다는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 선생의 조카인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의 문중을 찾았다. 선조 때의 현명한 조정의 일꾼이며 선조의 어명으로 왕립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호당(湖堂)에서 근무를 하였던 학문 높은 해월헌 종가는 시원하게 쭉쭉 뻗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호위하듯 감싸고 있었다. 그 곳에 올해 99세, 내년이면 100세가 되시는 평해 황씨 13대 종부 이차야(李次也) 여사는 오늘도 종가를 지키고 있다.

■ 어른 시키시는 대로 하니 주인이 되데요.

"애쓰이는 것도 없고…사랑해주는 것만 받았던 후덕한 시어머니께서 하시던 것을 그대로 따라했더니 안주인이 되어 있데요." 이렇게 운을 떼는 노종부는 1911년 6월 28일생이다. 윤기 있는 백발의 머리, 유난히 희고 맑은 피부, 빳빳하게 다려 입은 모시옷에서 삶의 연륜, 종부로서 살아 온 깊이가 느껴졌다.

그녀는 안동 법흥동의 반가인 고성 이씨(固城 李氏) 집안에 태어나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동갑내기 신랑 평해 황씨 13대 종손에게 시집왔다.

"안동서 첫 새벽에 가매(가마)매는 사람 넷, 교대하는 사람 넷 해서 가마꾼만 여덟이고 짐꾼까지 합치면 스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랑 같이 사흘을 왔어요. 시집오니 시아버님이 서른 다섯, 어머님이 서른 셋, 시동생 둘이 열 한 살, 세 살이고…하루 종일 일이다 보니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래 살았어요."

그런데 시증조부였던 독립운동가 황만영(黃萬英, 海月의 11대손)이 종가의 재산 대부분을 독립군 양성을 위해 쓰고, 나라와 지역의 일에 매달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시아버지는 종부가 시집을 온지 한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종가의 살림도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 26년을 살아도 한 번 싸운 적 없던 남편, 허물이 있어도 그럴 수 있다 해야지요.

바닷가에 자리 잡아 바다 구경을 위해 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리고 종가에 제사도 많아 불천위 3위(位)에다 5대 봉제사까지 치루고 문중의 대소가까지 종가에서 진행했다. 집안에 있을 때는 "경사가 많으니 애 안아볼 여가도 없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도 이차야 여사는 문화생활을 놓치지 않아 일곱 살 때부터 친정 어머니께 배운 꼼꼼한 바느질 솜씨는 맵짜기로 소문 났고, 인근 사돈지는 도맡아 놓고 쓸 정도로 글도 잘 지었다. 역사소설이나 고전을 유난히 좋아하셔서 10년전까지만 해도 책을 많이 사다 날랐다며 14대 종손 황의석(黃義錫)씨가 옆에서 훈수한다. 시집와서 아들을 낳아 종가의 대를 이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띈 종부였지만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줄줄이 딸을 낳아 종가의 면목이 없었던 차에서 스물일곱에 드디어 본 아들이다.

종부 나이 마흔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6'25는 종부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그 고생을 어째 다 말로 해요. 6'25가 터지던 때 서울(종손의 직장 때문에 12년 동안 타지 생활을 했다.)에서 시어머님하고 아들 딸 육남매, 일찍 세상 뜬 시동생 애들 둘까지 열 식구를 거느리고 서울서 안동을 거쳐 평해까지 천리 길을 피난 오는데…그 고생은 말도 못해요."

그렇게 다 어렵던 시절, 남편은 잠시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갔고 아직까지 소식을 모른다.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14대 종손 황의석 어르신은 바랜 사진 두 장을 보여주신다. 바로 13대 종손의 사진이다. 종가의 오래된 사진첩 속에서 발견한 13대 종손 어르신의 사진은 좋은 체구에 반듯한 얼굴 현 종손과 많이 닮은 모습이다.

"아버지가 끌려가시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해요. 내가 13살이고 내 동생이 11살일 때 아버지가 어디 끌려가시니까 둘이 같이 따라갔는데 거기가 어디 2층으로 된 건물이었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를 않으니 해가 지고 그래서 집에 돌아왔지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아버지의 생사(生死)도 알지 못하고 흘러간 무심한 세월, 아버지가 집을 나가신 후 30년, 그러니까 한 대가 지나서 문중에서는 길제(吉祭'종손이 되는 의식)를 지냈다. 처음 오래된 사진을 봤을 때 참 감개무량했다는 종부. 이제는 남편의 얼굴을 봐도 별 느낌이 없지만 26년 살아도 한 번 싸운 적 없던 남편은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 안 보낼라 그래도 그게 안 되데요.

고생스러웠던 시간들이었지만 그래도 종부에게는 '저들 벌어' 성공한 아들, 딸들이 있어 행복했다고 한다. 첫 아들은 고등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있다 퇴직했고 둘째 아들은 서울대 교수로, 딸은 의성 사촌 영천 이씨 경정 종택 종부로 시집보냈다. 종부로 살아보니 너무 힘이 들어서 딸은 종부로 시집보내기 싫었다는 종부. "딸을 안 보낼라 그래도 그게 안 되데요. 겉으로는 적이 없어야 되고, 속은 힘든 게 종부니 마음으로 끝없이 수양해야지요. 요즘이야 세상이 얼매나 좋아요. 이래 여인네들 하고 싶은 거 있거든 재주 마음껏 피고 사소."

암울했던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는 잡풀이 돋아났고 6'25를 겪으며 남편은 인사도 남기지 못하고 곁을 떠났다. 한평생 유교를 덕목으로 삼은 종가의 여인네로'그런 줄 알고'살았던 삶이었다.

"이래 더 이야기 좀 하다…시큰 노다 갔으면 좋겠다."

한 세기를 살아 온 종부, 친숙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재)안동축제관광조직위원회 김은정 vkehd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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