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는 겉으로는 소탈하고 웃음이 많았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양쪽을 오가며 조정하는 수완이 뛰어났다. 정치가로서는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는 신의가 없었다. 젊은 시절 영국 유학을 같이 갔던 고향 친구이자 동료 정치인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외에는 마음을 주고받은 이도 없었고 후배나 부하를 키우지도 않았다. 계산적이면서 본심(本心)을 숨겨뒀다가 앙갚음을 했다. 이런 성정을 볼 때 말년에 조선 통감으로서 조선 왕실과 민중을 철저하게 분열시키고 짓밟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재능은 있지만 의리는 없다=야마구치현 하기시 외곽에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격한 존왕양이 운동가로 막부에 의해 참수됨)이 세운 송하촌숙(松下村塾)이 있다. 지금은 사적지로 그럴듯하게 꾸며놓았지만 1857년 설립 당시에는 2칸짜리 초가에 볼품없는 학당이었다. 강의실로 쓰였던 방에는 요시다를 포함한 13명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들이 바로 메이지(明治) 유신의 주역이다. 이토의 초상도 한켠에 있다.
이토는 생전에 "요시다 선생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사실 이토는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미천한 신분인 자신을 학당에 받아준데다 학당 출신들이 유신을 주도하면서 덩달아 출세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하기에 있는 이토 별장 관리인 야나이 기요테루(74.楊井淸照)씨는 "하기 사람들은 요시다가 없었다면 이토는 물론이고 메이지 유신도 없었을 것으로 믿고 있다"고 했다.
이토가 앙심을 품게 된 것은 요시다가 써준 소개장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요시다는 이토에 대해 "다른 이들보다 재능이 떨어지며 학문도 미흡하다. 성격은 좋지만 화려하지 못하다"고 평했다. 요시다가 보기엔 이토는 마음에 차지 않는 제자였다.
학당 동문이자 조슈 양이파의 우두머리였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와의 관계도 그렇다. 상급 무사 가문에서 태어난 다카스기는 신분 의식이 강해 이토를 동지보다는 하인 취급을 했다. 그렇지만 다카스기는 조슈에서 잡병(雜兵)으로 이뤄진 기병대(奇兵隊)를 창설, 이토에게 30명의 부하를 거느릴 수 있게 했고 '주선가(周旋家)'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그런 다카스기가 1867년 폐병으로 죽음에 이르게 됐을 때 이토는 멀리 떠나면서도 병문안조차 가지 않았다.
'다카스기와 이토의 관계는 골목대장과 똘마니였다. 이토는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골목대장에게 마음속으로 반발심을 갖고 있었다. (신분상) 드러내놓고 대들 수 없었기에 묵묵히 따라갔던 것에 불과하다.' 이토의 행동은 '이제 다카스기에게는 볼 일이 없다'는 빠른 계산 탓이 아닐까.
유신 후에는 예전 자신의 상전이자 유신 3걸의 한 명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도 소원해졌다. 이토는 정치적으로 무능한 기도보다는 정권을 좌지우지하던 또 다른 유신 3걸 중 한 명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가깝게 지냈고 두 사람이 대립할 때면 오쿠보편을 들었다. 오쿠보의 후원을 받아 관료로 승승장구한다.
◆살인을 한 유일한 총리=이토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히카리에 있는 '이토공 자료관'을 찾았을 때다. 그곳 관계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안중근 의사에 대해 묻자, 그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고는 하지만 테러는 나쁜 짓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일본인들의 정서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메이지 유신은 테러와 암살을 통해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의 보복이 난무했다. 이토도 그 범주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출세욕에 몸부림치던 이토는 2건의 살인사건에 연루돼 있다.
첫 번째는 1862년 에도(현재 도쿄)에서 막부의 첩자로 의심되는 낭인무사를 조슈번저로 유인해 죽인 일이다. 리더였던 다카스기 신사쿠가 그 낭인과 얘기를 나누다 갑자기 칼질을 하자 여러 명이 달려들어 난도질을 했다. 이토는 검술 실력이 형편없는데도 앞장서 칼을 휘둘렀다. 사체를 버리는 것도 신분이 낮은 이토의 몫이었다.
그로부터 열흘 후 이토는 독자적으로 기획한 테러를 감행한다. 목표는 막부의 국학 강습소 교수인 하나와 지로였다. 하나와가 일왕의 폐위 선례를 조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인데 실제로는 잘못된 소문이었다. 이토는 동료 1명과 함께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밤중에 골목길에 숨어 기다렸다. 가마를 타고 오는 57세의 늙고 허약한 학자에게 달려들어 칼로 살해하고 머리를 부근의 집 담에 매달았다. 이 사건은 시바 료타로의 소설 '막말의 암살자'에 잘 묘사돼 있다.
몇달후인 1863년초 이토는 꿈에 그리던 '무사' 사령장을 받는다. 비록 세습을 하지 못하고 당대(當代)에 한하는 최말단 무사였지만 어엿하게 성(姓)을 쓸 수 있고 시중꾼 신분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이토는 두 차례의 살인을 포함한 공적으로 신분 상승을 이루게 됐다.
이 때문에 이토는 내각총리대신을 4차례나 지냈지만 유일하게 살인을 한 총리로 기록됐다. 이토 전후에도 양이파 혹은 군인 출신들이 총리직에 올랐지만 전쟁터에서 칼을 휘둘렀을 뿐, 노상에서 남을 벤 이는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토가 생전에 암살 경험이 있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사후에 이토 자신의 구술과 조사에 의해 밝혀짐) 보통 무사 자제와는 달리, 검술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에 '허풍'이라고 여겼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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