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비운의 축구선수' 영남대 김병수 감독

19세 국가대표·축구 천재…화려한 수식어 잊고 '제2 김병수' 만든다

17일 오후 영남대 후문 인근의 인조잔디 축구장에서는 유니폼을 맞춰 입은 학생들의 연습이 한창이었다. 얼핏 보면 연습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공을 갖고 노는 듯한 분위기. 검은 운동복을 입고 호루라기를 열심히 불어대는 웬 아저씨가 그들 사이에 없었더라면 공 하나를 두고 뺏기 게임을 하는 학생들로 판단했을 터. 하지만 이들은 틀림없는 영남대 축구부였다.

센터서클 안에서 공을 빼앗는 게임을 통해 패스 연습을 하고 있는 축구부원들 사이로 조금씩 보이던 호루라기 아저씨는 "뺏어, 뺏어, 빠르게"를 계속 외쳐댔다. 축구부원들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조금씩 다가서자 호루라기 아저씨의 모습도 선명해졌다.

면도를 하지 않아 짙푸른 잔수염이 그의 턱을 감싸고 있었다. 언제 했는지 그의 파마머리는 아직 덜 풀려있었다. 운동복 차림에 운동화. 꾸민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리가 불편한지 약간 절룩이던 그를 하지만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1988년 청소년 대표를 거쳐 19세의 나이에 전격적으로 국가대표에 발탁, '한국 축구의 미래' '차세대 선두주자'라는 수식어를 몰고 다녔던 '김병수'가 바로 호루라기를 불어대던 아저씨였다.

◆1992년 말레이시아

1992년 초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바르셀로나 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일본과의 경기가 끝나갈 무렵 한국은 오른쪽 코너킥 찬스를 얻었다.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를 순간이었다. 어처구니없이 볼은 골문 근방에 오지도 못하고 다시 흘러나갔다. 하지만 하늘이 도왔을까. 흘러나온 볼을 다시 잡은 한국은 낮은 센터링을 한 번 더 올렸다. TV 브라운관에는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와 파란 유니폼을 입은 한명의 한국 선수가 클로즈업됐다. 일본 골키퍼는 골대 왼쪽으로 쏠렸고, 한국 선수는 날아오는 공을 왼발로 원바운드시켜 골을 성공시켰다.

등번호 10번을 단 그 선수는 두 팔을 뒤로 젖힌 채 포효했다. 뭐라고 외치긴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챌 수 없었다. 그 대신 TV 현지 중계 캐스터는 연방 외쳐댔다. "아, 김병수 선수가 기가 막히게 골키퍼를 속이고 넣었어요. 골문 앞에서 웬만한 선수는 왼쪽 구석으로 차넣는데 말이죠. 정말 대단한 선숩니다. 역시 한국 축구의 희망입니다. 김병수!"

어쨌든 골은 들어갔고 그 골 덕분에 한국은 일본에 이겼다. 그리고 한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일본전에서 골을 넣은 김병수를 올림픽에서 볼 수는 없었다. 그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직전 3개월가량 연습을 했을 뿐. 고질적인 부상으로 2년간 쉬고 있던 상태였던 것. 최종예선 직후 그는 다시 다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2009년 영남대 축구장

"아, 그때요?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공이 제 몸 뒤로 왔습니다. 골문을 등지는 자세가 된 거죠. 그래서 그렇게밖에는 찰 수 없었어요."

1992년 왜 하필 원바운드로 공을 찼는지 묻자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1992년 당시 TV 현지 중계 캐스터의 목이 터질 듯한 흥분에 부응하지 않는 담담한 대답이었다.

김병수라는 존재를 지금의 아이들도 알고 있을까. 축구부원들에게 물어봤다. 1988년 전후로 태어난 학생들의 뇌리에 김병수의 활약이 크게 남아있을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물어봤다.

"감독님이 플레이하시는 걸 본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당시 실력이 상당했다고 들었습니다."

무릎과 발목 인대 부상 이후 수술도 제대로 받지 못해 3년 전부터는 조깅도 할 수 없는 감독을 보며 축구부원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지금의 박주영이나 박지성 정도라고 들었어요."

김병수의 얼굴에 쓴웃음이 서렸다.

김병수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국가대표로 4회 연속 월드컵에서 뛰었던 홍명보 현 청소년국가대표 감독의 자서전에도 잘 나와있다. 고려대 축구부 시절에 대한 회상이었다.

'초고교급 스타들이 모두 후배로 들어오면서 팀 전력이 엄청나게 보강됐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로 대어급 선수들이다. 이들도 들어오자마자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다. 너무 네임 밸류가 높은 후배들이 들어오다 보니 대학선발과 같은 대표팀 선발시에는 항상 나는 찬밥일 수밖에 없었다. 워낙 이름에서 밀렸기 때문에 학교에서 추천할 때마다 서정원, '김병수', 노정윤 등이 선택되었다. 한편으로는 안 좋은 마음이 있었던 걸 부인할 수 없지만, 축구를 잘하는 후배들이었고 게임을 할 때 마음이 잘 맞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2002년 홍명보의 저서 '영원한 리베로' 中 일부)

◆'천재'라는 이름을 끊임없이 괴롭힌 '부상'

축구부원들의 훈련은 의외로 짧게 끝났다. 놀이 비슷한 것을 1시간 30분 정도 한 뒤 연습이 끝났다고 하니 약간 당황스러웠다. "이틀 전 경기를 치러 체력회복이 우선이기 때문"이라는 감독 김병수의 설명이 뒤따랐다. 강한 훈련만 고집하면 부상 선수가 나올 수도 있으며 중요한 것은 별무소득이라는 것.

"지금은 전술훈련을 할 때가 아닙니다. 즐길 때지요."

김병수는 부상을 극도로 견제하고 있었다. 천재 김병수를 앗아간 게 부상이었으니 지긋지긋함을 넘어 원망스러울 정도.

"당장 게임이 중요하긴 하지만 선수의 생명이 짧아집니다. 요즘 학생들도 그걸 잘 알아요. 아프면 아프다고 바로 말하라고 지시합니다. 일주일 쉬어서 해결될 문제를 제때 돌보지 않으면 한달, 심하면 1년 넘게 쉬어야 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인지 선수들은 연습이 끝난 뒤 몸풀기 운동도 간단히 이어갔다. 이 같은 훈련방식은 김병수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 선수시절 경기가 끝난 뒤 샤워를 하고 쉬는 게 전부였던 그는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스트레칭이 중요하다는 걸 강하게 느꼈다고 했다.

고교 1학년 때부터 찾아든 부상은 이후 번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지 왜 계속 게임에 뛰었냐, 그때 감독들이 원망스럽지 않으냐고 했더니 그의 답이 가관이다.

"물론 그때 부상을 안 당해서 선수생활을 좀 더 했더라면 지금은 경제적으로 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결국 제가 갈 길은 지도자의 길이거든요. 히딩크도 무릎이 안 좋지만 훌륭한 지도자의 길을 가고 있잖아요."

◆자기 계발에도 힘써야 훌륭한 선수

부상에 대한 얘기를 더 꺼내려 하자 축구부 학생들의 연습이 완전히 끝났다. 자연스레 그와 함께 숙소로 향했다. 감독실이라고 한 칸 있는 방에는 의외로 책이 많았다. '설득의 심리학'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등 비교적 신간 서적도 눈에 띄었다. 책갈피가 책 사이에 꽂혀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장식용처럼 보이진 않았다. 운동부와 책은 거리가 멀다는 편견이 조금은 깨졌다.

그의 책상 위 벽에 붙은 글귀도 눈에 띄었다. '아인슈타인의 법칙'이라고 적힌 세 문장. 부상으로 자신의 재능을 날려버린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면 꼭 필요해보이는 말들이었다.

-아인슈타인의 법칙

1.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단순한 것을 찾아라

2. 불협화음 속에서는 화음을 찾아라

3. 어려움 한가운데에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최연소 기록을 잇따라 세우며 늘 두각을 나타냈던 '천재'가 나락으로 떨어져도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같았다.

◆간단한 인터뷰

짧지만 그의 축구철학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인터뷰를 가졌다. 그의 말은 장황하지 않았다.

-언제 가장 축구를 잘한 것 같나.

"26세. 일본에 있을 땐데 그때는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 눈에 그려졌다."

-축구는 뭐라고 생각하나.

"놀이다. 창조적인 놀이. 의무감으로 축구를 하면 백전백패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축구부원들이 까마득한 후배들이기도 한데 이것만은 꼭 지키라는 게 있나.

"받은 용돈의 3분의 1은 반드시 저금하라고 한다. 그게 앞날을 내다보는 책임 있는 자세다."

-스타 출신 지도자로서 본인의 역할은 뭔가.

"아이들의 잠재능력을 끄집어내는 거다. 각자에겐 동기부여를 해주되 그들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 감독이 움직이면 아이들이 먼저 안다. 강요하지 않는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김병수는?

1970년 강원도 홍천 출생

홍천초교-미동초교-경신중·고-고려대

1988년 청소년 대표

1992년 올림픽 대표

1993년 일본 실업축구 리그 코스모석유 입단

1997년 일본 프로축구 오이타 트리니타 입단

1998년 고려대 코치, 포철공고 코치

2003년 프로축구 포항 스틸러스 2군 코치

2008년 영남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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