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를 '원시인'이라 부른다. 현대인의 필수 요소인 자동차, 휴대폰, 컴퓨터를 고집스레 거부하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불편하다고 불평해도 들은 척도 않는다. 그러던 그가 최근 두 가지 문명은 접수하게 된다.
컴퓨터의 경우 논문 작성에 필요불가결의 요소일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학생들과 교감할 수 있는 이메일 때문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휴대폰은 병상에 누워 계신 노모의 건강이 갑자기 위태로워질까 염려하여 마련하게 되었다.
그의 효성을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노모가 거동을 못하시고 자리에 눕게 되자 결혼까지 미루어가며 오직 노모의 봉양에만 힘썼다. 대소변을 받아내고 살뜰히 목욕까지 시켜드렸다. 그래도 의식이 멀쩡했던 노모는 장성한 아들에게 벗은 몸을 보이시기 민망해 하셨고, 이런 어머니를 극진히 위로해 가며 온몸을 정성껏 닦아드렸다.
그에게 2006년 7월 14일은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 되고 말았다. 노모가 쓰러지고 병원에서 열흘을 넘기시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아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에 들러 의식이 없는 노모를 주무르고 하루 일과를 보고드렸다. 그는 매일 간병일기를 써가며 병세에 따라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다. 드디어 2007년 4월 17일, 노모의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회생의 기미가 보이게 되자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는 사실 자체에서 무엇보다 큰 기쁨과 감사를 얻었던 것이다.
나는 대학 재학 시절 수차례 시골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하여 한방에서 뒹군 적이 있다. 그때마다 음식을 내오시며 수줍게 아들 친구에게 인사하시던 노모의 자애로운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당시 그는 "우리 어무이 내 어릴 때 병구완하시느라 너무 고생 많으셨어"라고 하며 죄송해 했다. 지금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어릴 때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어무이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과 고생을 다하셨지. 그러니 내가 어무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나?"
그는 스피노자와 불교 철학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이십 년이 넘도록 한 줄기의 연구에만 주력해 왔다. 이제 박사 과정에 입학한 지 이십여 년 만에 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불교는 이론이 아니라 수행으로 접근해야 한다던 평소의 신념처럼 오랜 세월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체험으로 빚어낸 결실이기에 더욱 빛나 보인다.
성 박사, 그동안 수고 많았네. 그리고 진심으로 축하하네.
장윤수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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