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구황 음식으로 먹던 국수, 바쁠 때 서서 후루룩 마시듯 먹던 국수, 저렴한 가격에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인 국수….
결코 고급 음식이라고 할 수 없는 국수가 어떻게 아시아와 중동, 유럽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랑받는 국제 음식이 됐을까. 국수를 처음 먹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국수에는 어떤 매력이 있기에 세월의 파괴력을 이기고, 높은 산과 깊은 물을 건너 동양과 서양을 구분 않고 뻗어나갔을까. 이 책은 2009년 초 KBS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국수의 탄생과 전파, 문화권에 따른 변이와 발전, 국수에 관한 오해 등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네이처지는 영국 BBC 뉴스를 인용, '인류 최초의 국수는 중국 칭하이성 황허 유역의 라자 유적에서 발굴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 지역의 학자들이 4천년 전의 국수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현지 답사에서 국수의 유물을 확인할 수 없었다. 현지 학자는 사진을 찍었지만 국수 유물은 몇 시간 후에 흙먼지가 돼 사라졌다고 했다. 당시 찍었다는 사진 또한 의심스러웠다. 국수의 주재료가 좁쌀이라는 점도 의문이었다. 좁쌀은 끈기가 없어 오늘날에도 면으로 뽑기 어렵다. 게다가 이 지역은 수몰이 잦은 곳이어서 비록 신석기 시대 지층에서 유물이 나왔다고 해도 다른 시기와 섞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었다.(지은이는 칭하이성 라자 국수 유적은 과장된 것으로 결론짓는다.)
답사팀은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화염산 사람들이 2천500년 전 밀로 만든 국수를 최초의 국수로 보고 있다. 이 국수를 만든 사람은 동양인이 아니라 키와 골격이 유럽 인종과 흡사했다.(그들이 어떤 이유로 여기에 정착해 살다가,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국수가 하나의 완성된 음식 분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중국 송나라 때이다. 허난성은 중국 최대의 밀 생산지이자 송나라의 주무대다. 송나라 사람들은 일상의 속도가 빨랐던 모양이다. 외식을 할 때도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필요로 했다. 국수는 가늘고 길어서 삶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고 조리법도 간단했다. 후루룩 마시듯 먹을 수 있으니 먹는 시간도 짧았다. 송대 사람들에게 국수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렇다고 송대 사람들이 아무 음식이나 먹었다는 말은 아니다. 송나라 사람들은 시간을 갖고 느긋하게 음식을 즐기는 대신 '순간의 미학'에 집중했다. 국수는 다양한 재료와 양념으로 여러 가지 맛을 낼 수 있는 음식이었다.
송나라 때 국수는 종류도 다양했다. 양고기 국물을 낸 암생연양면, 마늘과 귤 껍질로 만든 소스에 무쳐 이탈리아 파스타와 비슷한 맛을 내는 세물료기자, 돼지고기와 닭고기로 국물을 낸 동피면, 물로 식혀서 먹는 냉동기자, 밀반죽을 손으로 비틀어 불규칙하게 썰어 고기, 야채와 함께 먹는 흘달, 동피숙회면, 혼돈, 채면, 호접면 등 다양한 국수가 등장했다.
문자도 송나라에 이르러 국수가 음식장르로 완성됐음을 보여준다. '옛날에는 그저 숟가락을 쓰고 지금은 모두 저(箸)를 사용한다'는 기록도 송나라 때의 기록이다. 면(麵)과 병(餠)이라는 글자를 완전하게 구분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당시까지는 병과 면 모두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총칭하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면'이라는 글자가 '병'과 별개로 국수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사계면, 삼선면, 초선면 등이 그것이다.
송나라에 이르러 활짝 꽃핀 국수는 중국을 넘어, 아시아로 퍼져 나갔다. 태국, 베트남, 한국, 일본, 부탄 등으로 확산되는 동안 국수는 각 문화권마다 환경과 문화의 차이로 변주를 거듭하며 발전했다.
국수가 일본에서 패스트푸드로 자리를 잡았다.
에도 시대(도쿠가와 막부시대)에 일본의 에도(현재의 도쿄)는 남성들의 도시였다. 당시 쇼군은 지방 다이묘들의 충성을 확인하고 통제하기 위해 '참근 교대제'를 실시했다. 다이묘의 처자식들을 에도에 인질로 잡아두고, 다이묘들이 1년은 자신의 영지에서, 1년은 에도에서 살게 한 것이다. 260명에 달하는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이 참근 교대를 하기 위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적게는 100여명, 많게는 4천여명의 인원이 붙었다. 매년 에도에 30만, 4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오고간 것이다.(당시 에도는 인구 100만으로 베이징 60만, 파리의 55만명보다 훨씬 많았다.) 또 당시 에도에는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기술자들과 상공업자들이 많았다. 이들을 조닌이라 불렀다. 다이묘를 따라온 수행원들과 조닌들은 대체로 지방에 처자식을 두고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음식점이 필요했다. 일본에 수많은 이동식 야다이가 등장한 것이 이때다. 야다이에서는 미리 삶아놓은 소면에 끓인 물을 끼얹어 팔았다. 이것이 '가케소바'다. '가케'는 '끼얹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국수가 동서양을 뛰어넘고 긴 시간을 이어 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국수는 어떤 식재료와도 잘 어울리는 뛰어난 적응성, 빨리 조리할 수 있고 빨리 먹을 수 있는 신속성, 건조해 장기 보존과 휴대가 편리한 점, 고명이나 양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낼 수 있다는 독특함이 그 이유였다. 또 가격이 저렴하면서 한 그릇 안에 여러 가지 영양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국수는 어느 한 문화권, 어느 한 세대가 완성한 식품이 아니다. 각기 다른 나라, 다른 회사가 여러 가지 부속품을 만들어 하나의 제품을 완성하듯 국수 역시 여러 식문화권에서 여러 가지 재료와 요리법으로 수천년의 세월을 보태면서 만들어낸 발명품인 것이다.
밀이 인류에게 전해진 것은 6천여년 전, 그리고 화염산의 미라부족이 최초의 국수를 만든 것은 2천500년 전, 이제 국수는 전 세계를 넘어 우주로까지 진출하고 있다. 일본의 닛신 식품 중앙 연구소는 우주 비행사를 위한 라면 4종류를 이미 개발했다. 간장맛, 된장맛, 카레맛, 돼지 사골맛이 그것이다. 405쪽, 1만6천8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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