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하늘 볼 여유가 생겨 교정을 활보하기로 하였습니다. 본관 돌계단을 내려와 건물을 돌아 오른쪽 계단으로 오릅니다. 일부러 솔향기를 좇은 것도 아닌데 소나무 숲에 들어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보통 걸음걸이로 불과 1분 차이의 거리, 전혀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어슬렁어슬렁, 뒷짐을 진 채 갈지(之)자 걸음을 걷습니다. 조금만 서둘러 걸으면 모처럼의 행복이 금방 끝나버릴 것 같아서 아껴 걷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걷다가 팔을 휘저어 보기도 하고 몸을 비틀기도 합니다. 눈을 들어 솔잎 사이의 하늘을 올려보기도 하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기도 합니다. 소나무 숲이 끝나고 대학원동을 지나 백양로에 들어섭니다.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얽혀진 자연 터널 백양로는 그야말로 여름철 최적의 피서지입니다. 바닥은 나무 뿌리의 자국이 마치 정맥처럼 드러나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양측 나무 뿌리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노래하는 듯 보입니다. 일청담 쪽으로 조금 더 가다가 오른편 테니스장 사이로 난 오솔길에 들어섭니다. 양측에 잡초들이 무성합니다. 평소 보이지 않던 풀들이 눈에 뜨입니다. 방학이라 인적이 드물어 안심하고 자란 모양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다들 신기한 모양새들입니다. 작은 꽃들도 예쁘기 그지없습니다. 오랫동안 들여다 봅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매번 보면서도 스쳐보기만 했던 풀들입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참아름다움에 새삼 놀랍니다. 그러다 문득 그 많은 풀들 중에 이름을 알고 있는 풀이 몇 개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하여 내친김에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골랐습니다. 정진해 교수님의 '우리 땅에서 자라는 야생초와 나무 792'(맑은 소리, 2009)입니다.
정진해 교수님의 책은 한마디로 경이로움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산이나 들에서 보았던 들풀들의 생생한 사진, 그냥 잡초라고만 알고 있던 너무나 익숙하고 친숙한 풀들 하나하나에 예쁜 우리말 이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재배 식물 38종과 포자 식물 15종을 포함해 총 792종의 식물마다 약성과 약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한민국 땅 지천에 늘린 강아지풀, 농부들에겐 잡초의 대명사로 알려진 강아지풀이 피부 질환이나 상처에 약용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사진을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자세한 설명을 해 놓은 것도 책의 특징입니다. 감국은 가을이면 산과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9~10월에 노란 두상화가 줄기 윗부분에 위로 흩어진 모양으로 달린다. 잎은 짙은 녹색이고 어긋나게 나며 잎자루가 있고, 둥근 달걀 모양으로 보통 깃꼴로 갈라지며 끝이 뾰족하다. 열감기, 폐렴, 기관지염, 두통, 위염, 장염, 종기 등의 치료에 약용한다.
저자는 지금 서울 약용식물관리사협회에서 약용식물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분입니다. 지난 10여년간 우리 땅 곳곳을 다니시며 일일이 사진을 찍고 자료를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 교수의 책에는 우리 땅에서 나고 자라는 식물들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도시와 농촌 어디에나 집 주변과 길가, 논과 밭, 산과 계곡, 해변과 하천 등지에서 흔히 자라는 식물들입니다. 몇 가지는 귀화 식물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 역시 이미 우리 땅에 토착화된 우리 식물들입니다. 책을 대하면 우선 정성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부지런함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부끄러움이 느껴집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연구하는 정치학자로서 평생을 살면서도 바로 곁에서 피고 지는 풀들의 가르침조차 배우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그러면서 엘리트 정치론을 강의하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한 듯합니다. 봄빛을 연두색으로 만들고, 여름빛을 녹색으로 만들고, 가을빛을 황금색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들판을 가득 메운 들풀이라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늦게나마 우리 땅의 들풀을 알게 되어 '겨울이 되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스스로 흙이 되어버리는 겸손함'을 배웠습니다.
경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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