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성 in 여성]소리꾼 최수영씨

사람은 살다보면 우연한 계기로 인생의 전환을 맞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수영(47'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전수자)씨도 그런 경우의 하나이다. 평범한 주부였던 그가 국악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우연이자 필연이 된 셈이다.

충남 논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갓집이 있는 대구로 와 잠깐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했다. 개인사업을 하는 남편과 평범한 가정생활을 꾸리던 30대 초반 갑자기 찾아온 우울증에 시달렸다. "젊은 사람이 병원을 찾아오느냐. 큰 병이 아니니 마음 편하게 취미생활을 해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찾아간 곳이 복지회관 내 주부대학. 이곳에서 장구를 치다가 소리도 해보고 싶었고, 춤도 추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몸이 아파 시작한 국악이 삶의 일부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 길로 이은자(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이수자) 선생을 찾아 본격적으로 국악을 사사했다. 민요'무용'장구 등을 배우며 국악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처음에는 민요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주부대학에 다닐 때는 주위에서 "소리를 잘한다"는 얘기를 듣고 우쭐한 마음에 우리가락을 부르는 것이 쉬울 줄 알았는데 스승의 소리를 듣고는 주눅이 들었다. 이후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소리를 한다"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진정한 우리의 소리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피나는 연습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언제, 어디서든 오직 우리 소리를 잘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개인연습실이 없었기 때문에 집이나 차안에서 연습에 매달렸다. 스승의 소리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녹음한 테이프를 밤새 들으며 정진했다. 국악은 악보가 없기 때문에 스승의 소리를 녹음해 배우지 않으면 실력이 늘지 않기 때문이다.

인근 공원을 찾아 차 안에서 테이프를 들으며, 우리 소리를 연습하기 일쑤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차안에서 연습하는 자신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8년여의 정진 끝에 2003년 마침내 이춘희(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보유자) 선생으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전수증을 받게 됐다.

그러나 그의 소리에 대한 집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42세 되던 2004년 대구예술대에 입학해 4년 과정의 국악을 전공했다. 40대의 만학도로 딸 같은 급우들과 공부하며 내공을 길렀다. 젊은 세대와 같이 호흡하며 자신도 젊어지는 느낌이 들었으며 좋아서 하는 공부라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 가진 개인발표회는 그에게 인상적이었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그리 큰 욕심이 있겠습니까. 다만 내게 주어졌을 때 어김없이 해낼 수는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는 만학도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기 위해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추운 겨울 홀로 연습실에서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는 쉬지 않고 소리를 했으며, 작정한 연습시간보다 5분이라도 더 하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자신의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누구에게도 소리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그이지만 졸업발표회 때만큼은 자신의 공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가락의 멋은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데 있어요. 여인네가 물동이를 이고 가듯이 원의 가락이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떨림의 미학이지요." 한오백년'노랫가락'창부타령 등 고요하고 슬픈 우리 민요를 즐겨 부르는 그는 우리의 가락을 이렇게 표현했다.

평범한 주부에서 우연히 배운 우리 소리의 매력에 빠져 오늘에 이르게 된 그는 이제 자신의 미흡한 소리지만 이웃에게 나눠주고 싶다고 말한다. 문화센터나 문화예술회관의 강사로, 학교나 기업체 등 특강을 통해 우리의 고유 가락을 전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찾아 무료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작은 개인연습실을 갖고, 내 소리를 좋아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들려주고 싶은 게 작은 소망입니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것보다 속이 알찬 국악인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도 진정한 내면 세계에서 나오는 소리를 통해 모두의 박수를 받고 싶을 뿐이다. 010-8576-4911.

전수영기자 poi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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