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시장
해방 전부터 난전이 있었다. 그 뒤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 자연 발생적으로 농산물 시장이 형성되었다. 무태'조야'검단'동촌 같은 인근의 농민들이 재배한 채소며 과일을 가져와 팔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대형시장의 모습을 갖추면서 신선한 농산물을 값싸게 판매하는 시장으로 널리 알려졌고, 전국의 농민들이 농'수산물을 가져와 위탁 또는 경매 방식으로 판매하고 있다.
1974년 재개발사업으로 상가를 정비하였다. 칠성시장'대구청과시장'삼성시장 등으로 구역을 나누어 독립 상가를 건축하였고, 주변에 청과물 위탁판매 상회를 비롯한 여섯 개의 독립 시장이 형성되었다. 그와 함께 생선이나 어패류 같은 신선한 수산물을 판매하는 가게들도 들어섰으며, 도로변에 가구상가'중고 전자상가'공구상가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칠성시장은 서민들에게 인기가 높다. 특히 청과물 시장이 유명해 상자로 사거나 대량으로 구입할 때면 누구나 이곳을 이용한다. 그도 그럴 것이 청과물이나 농'수산물을 도매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김밥'만두'돼지고기'닭고기'개고기'제수용품 같은 다양한 상품을 싸게 살 수 있다. 그와 함께 길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난전에서 잉어나 가물치 같은 수산물을 살 수 있고, 손님들이 요구하면 즉석에서 고아 주거나 삶아 주기도 한다.
근래에 들어 재래시장 현대화 사업을 통해 상가시설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또한 하천부지에 대형 공영주차장을 마련하여 이용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와 함께 대중교통 체계가 잘 짜여 있어서 시장을 보는 데 불편함이 없다. 설령 상품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산다는 것이 심드렁해질 때 한 바퀴 돌아보면 생활에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그야말로 시장은 사람살이의 훈기를 느낄 수 있는 체험 현장이기도 하다.
#방천시장
경상도에서는 '제방'을 '방천'이라 했다. 제방 옆에 자리 잡았다고 해서'방천시장'으로 불렸다.
해방 이후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 돌아와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시작했던 것이 시초였고, 처음에는 몇몇 상인들이 새끼줄로 구획을 나눠 자리를 정리했다. 또한 시장 남쪽에는 당시 삼덕동에 있던 교도소 수감자들의 노역장인 채소밭과 벽돌 공장이 있었다. 30여년 전에 시장 허가를 받았고, 칠성동까지 이어지는 큰 시장이었으며, 한때는 경산'고산'청도의 주민들도 이용할 정도로 번창했다. 당시만 해도 신천의 물이 맑고 고목이 많아서 목욕이나 낚시를 하기에 좋았다.
한국전쟁 당시의 이야기다. 서울이 점령당하자 대부분의 신문사가 폐쇄됐지만 대구와 부산에서는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지역신문이 아침에는 속보판, 오후에는 석간을 발행하고 있었으며, 소개령이 내렸는데도 휴간하지 않고 속보판을 통해 가장 먼저 전황을 알렸다. 당시 발행 부수가 15만부나 되었다.
소년들은 다른 신문을 제쳐두고 지역신문을 판매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그 가운데 한 소년이 방천시장에서 신문을 팔고 있었다.
그는 고작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네 식구의 생계를 위해 하루에 100부 정도의 신문을 팔아야 했지만, 시장 안에는 신문 파는 소년들이 많아서 남들보다 더 많이 팔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다.
우선 호주머니에 잔돈을 가득 넣어 가지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 거스름돈을 주고받는 시간을 줄였는가 하면, 먼저 신문을 돌려놓고 나중에 돈을 받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자칫하다가는 신문 값을 떼일 수도 있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인데, 그 같은 방법이 적중해 시장 안에서 신문 파는 것을 독점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어른이 되었고, 나아가 대기업의 회장이 되었다. 그가 바로 대우그룹의 김우중 전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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