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 먹세 그려
정철
한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어 메어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에 만인이 울어 예나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 곳 가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파람 불 제 뉘우친들 어쩌리.
'한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꽃을 꺾어 술잔 수를 꽃잎으로 셈하면서 한없이 먹세 그려/ 이 몸이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꽁꽁 졸라매 가지고 무덤으로 메고 가거나, 술이 달려있는 비단 장막(유소보장)이 처진 상여를 많은 사람들이 울며 따라가거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은백양이 우거진 숲에 가기만하면 누런 해, 밝은 달, 가랑비, 함박눈, 회오리바람 불 적에 그 누가 한잔 먹자고 하리요/ 하물며 무덤 위에서 원숭이가 휘파람을 불며 뛰놀 적에는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작품은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이다. 문학적 형태면에서 가사로 보기도 하고 시조로 보기도 한다. 이 노래가 가사집에 전하기도 해 가사로 보기도 하나 '청구영언' 등의 시조집에 수록돼 있고 현재도 가곡창·시조창으로 불리어 사설시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게 통설이다. 사설시조에서 정제된 모습을 처음 보여 최초의 사설시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용은 죽고 나서 뉘우친들 소용없으니 지금 실컷 술을 마시자는 것. 이백과 두보의 한시를 모방한 것이나 호방한 기상을 노래했다. 초장은 꽃 꺾어서 술잔 수를 셈하면서 도도하게 즐기는 낭만적인 정경을 그려내고, 종장은 무덤 주변의 삭막한 분위기를 그려 이승과 저승을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중장은 억새, 속새,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소소리 바람과 같은 순 우리말로서 인생무상을 표현했다. 호방한 성격을 가진 작가의 체취가 잘 드러나면서 허무·적막·애수의 정조를 짙게 보여준다.
그래서 죽자 사자 술만 마시자는 권주가로만 읽으면 오독이 아닐까 싶다. 삶의 허무나, 저승 가는 길에 빈부가 다르지 않다는 진부한 교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재미를 얻자. 초·종장의 대비되는 분위기, 중장의 사설과 가락이 주는 큰 재미를 놓칠 수 없다. 여러 번 읽어도 싫증나지 않고, 오히려 유연한 가락이 오래 입속에 머물며 야릇한 맛을 준다.
문무학 (시조시인·경일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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