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진 객석. 많은 관객들은 촉촉해진 눈가를 닦아내고 있다. 헬렌 켈러의 삶을 모티브로 해서 인도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 '블랙'(Black). 2005년에 제작된 영화지만 우리나라에는 다소 늦게 소개됐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9점대의 높은 평점을 기록한 작품. 아울러 인도 최대의 영화제 '페어 원 필름페어 어워즈'(Fair One Filmfare Awards)에서 2006년 11개 부문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고, 타임지가 2005년 영화 중 당당히 5위에 올려놓았던 작품. 늦여름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 '블랙'을 만나보자.
◆암흑 속에 갇힌 8세 소녀 미셸
8세 소녀 미셸 맥널리(아예사 카푸르)는 두 살 때부터 암흑 속에서 살았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삶. 그녀에게 세상은 '블랙', 그 자체였다.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아무런 소리도 없고, 아무런 빛도 없는 곳에서 얼마나 살 수 있느냐?"고. 주인공 미셸은 한 줄기 빛조차 없는 심연의 바다 속에서 마치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살고 있다. 언제쯤 그곳에서 벗어날 지 기약도 없는 그런 삶을.
가족들에게도 미셸은 골칫덩이. 동생과 인형조차 구별 못하는 그녀가 갓난쟁이 여동생을 내팽개쳤을 때, 아버지는 그녀를 마구 두들겨 패고는 정신지체보호소에 보내버리겠다고 한다. 식탁에 놓인 촛불을 넘어뜨리는 바람에 집이 온통 잿더미로 변해버릴 뻔한 일도 벌어진다.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그저 짐승처럼 손으로 마구 음식을 쑤셔넣는다.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 미셸에게 부모는 마치 개처럼 방울까지 달아놓는다. 미셸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구해 줄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빛이 사라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랑하는 딸을 꺼내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저 먹이고 입히고 재울 뿐. 절망의 연속이다.
그러던 미셸의 가족에게 특별한 손님이 찾아온다. 특수학교 교사 출신인 데브라지 사하이.(아미타브 밧찬) 삶의 목적을 잃은 사하이 선생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하지만 미셸을 만나며 새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된다. 넘어야 할 산은 미셸뿐이 아니었다. 지금껏 딸을 방목하다시피 키워온 부모에게 사하이 선생의 엄격한 교육 태도는 불편하기만 하다. 교육을 온전히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사하이와 그런 식의 교육 방식으로는 오히려 미셸의 상처만 키울 뿐 나아질 게 없다는 아버지. 급기야 아버지는 하루 만에 사하이를 해고해 버린다.
◆빛을 찾은 아이와 빛을 잃은 선생님
하지만 사하이는 아버지가 출장을 간 20일 동안만이라도 미셸을 맡게 해달라고 어머니에게 사정을 한다. 사하이는 암흑뿐인 미셸의 세상에 빛을 전하려 하지만 별다른 진전도 없이 시간만 흘러간다. 20일간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 여전히 사물과 단어를 연결짓지 못하는 미셸. 결국 출장갔던 아버지가 돌아오고, 사하이는 등을 돌리고 만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그때, 미셸은 기적적으로 말을 뗀다. 마당 앞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만지던 그녀는 '워~'(워터의 첫 발음)을 소리낸다. 한 줄기 빛이 스며든 것이다.
세월이 흘러 숙녀로 거듭난 미셸(라니 무커르지)은 대학 진학을 꿈 꾸고, 사하이는 곁에 머물며 그녀의 눈과 귀와 입이 된다. 설리반 선생과 헬렌 켈러의 이야기로 채워질 것 같던 영화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한다. 사하이 선생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것. 미셸에게 빛을 주었던 그는 이제 자신이 어둠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더 이상 미셸을 돌볼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어느 날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떠나버린다. 그로부터 12년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사하이가 돌아온다. 아무런 기억도 없고, 의식도 못한 암흑의 세계에 갇힌 채. 미셸은 그 옛날 사하이 선생이 자신을 어둠 속에서 꺼내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자신이 그를 구해주겠다고 한다. 의사들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하이의 기억이 돌아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과연 미셸은 자신이 받았던 한 줄기 빛을 돌려줄 수 있을까?
◆주연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력이 최대 장점
2006년 2월 인도 최대의 영화제 '페어 원 필름페어 어워즈'(Fair One Filmfare Awards)가 발리우드 영화의 본산 뭄바이에서 열렸다. 가장 주목받은 영화는 전년도에 개봉해 폭발적 반응을 모았던 '블랙'이었다.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남녀 주연상을 비롯해 11개 부문을 휩쓸었다. 남우주연상을 받은 아미타브 바흐찬(사하이 선생)은 비평가들이 뽑은 주연상까지 2관왕을 차지했다. 아울러 여주인공인 맥날리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는 8세 아예샤 카푸르는 천재적 연기를 펼쳤고, 성숙한 미셸 역의 라니 무커르지도 빼어난 연기력으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영화 '블랙'은 헬렌 켈러 이야기를 영화화했던 아서 펜 감독의 '미라클 워커'(1962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칫 눈물만 쏟아내는 신파로 흐를 뻔했던 영화는 배우들의 열연과 함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적절한 편집의 묘미 덕분에 긴장감과 감동을 살려냈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올라갔었던 '데브다스'(2002년)를 연출한 산자이 릴라 반살리 감독의 작품. 인터넷 포털상의 높은 평점에도 불구, 적잖은 관객들은 영화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음악 때문. 이번 영화 '블랙' 뿐 아니라 '데브다스'에 대해서도 관객들은 "오히려 음악이 감정이입을 가로 막고 있다"며 불평하고 있다.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감동을 자아내려고 효과음악을 사용하다보니 정작 감동을 느껴야 할 장면에서 '뜬금없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 하지만 부자연스럽게 귀를 자극하던 음악은 영화 도입부를 지나 중반을 넘어서며 스토리가 본격 전개되는 시점에 이르고 나면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바로 이것.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내가 그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은 유일한 단어입니다." 사하이 선생의 말이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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