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학부모 생각] 메타세쿼이아

이른 아침 피부에 닿는 서늘해진 공기가 제법 까슬까슬해 상쾌하다. 언제나 짧게만 느껴지는 방학, 함께했던 우리 아이들도 하나 둘씩 개학을 하여 분주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쓰는 어린 막내도 이제는 손 한번 흔들어 주고는 교문 안으로 씩씩하게 들어가던 날. 학교 앞 아름다운 메타세쿼이아 길의 운치에 취해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 '세쿼이아국립공원'. 언제 한 번 한가로이 다시 거닐어 보고 싶었던 그 시절이 언제였던가, 추억은 채색된다더니 해가 갈수록 수년 전 캘리포니아에서 만난 아름드리 멋진 그 거목들이 기억 속에 삼삼하게 떠다니곤 했다. 그 메타세쿼이아, 1억년 전 백악기 공룡시대 화석에서도 발견되는 '살아있는 화석나무'라고 했던가. 만약에 친하게 지내는 지인이 학교를 세운다면 꼭 교목으로 추천하고 싶은 이 나무.

이 길을 지나다니는 우리 아이들도 저렇게 드높고 곧게 자라 세계 속으로 쭉쭉 뻗어나갔으면 하고 잠시 생각해 본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반쯤 내려놓은 차창 옆에 한 중년 남자가 서 있다.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들면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태워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걱정이 스쳤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자세히 보니 한쪽 눈을 손으로 가리고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안과 병원을 찾아갈 수 있게 좀 태워달라"고 했다. 근처에 택시가 오늘따라 없고 지나가는 차도 없다고. 환자를 대하는 직업의식이 발동하는 가운데 속으로 '서로 믿고 살아야지'하는 생각에 두려움을 잠시 억누르며 심호흡 한 번 더 하고 연유를 물었다. 그는 "한창 진행 중인 공사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쇳가루가 눈에 튀어들어간 것 같다"고 했다. 마음을 낸김에 "내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으로 가면 어떨까요?" 물어보니 "빨리 치료하고 와서 일을 마저 해야 한다"며 택시 보이는 길까지만 좀 태워달라고 했다. 무척 급한 상황. 내색은 안 했지만 핸들잡은 어깨에 꽉 들어갔던 힘을 빼며 택시 타기 좋은 길까지 달려서 그를 내려주었다. 두려움을 가졌던 것에 대해 왠지 모르게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자꾸 남았다. 짧은 순간 내가 가졌던 망설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더구나 아픈 사람을…. 아무 일 없었던 듯이 그의 상처가 치료되어 잘 낫기를 바라는 것으로 위안을 삼긴 했지만 평소 아들들에게는 세상을 믿으라고, 특히 가까이 지내는 모든 사람을 무조건 믿어보라고 말했으면서 잠시나마 불신을 가졌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세상을 향한 은근한 사랑, 메타세쿼이아의 진한 그늘처럼 '사람들 사이에 무조건적인 두터운 믿음이 꼭 있어야지' 라고 대상 없는 다짐을 해본다. 우리 아이들에게 세상을 따뜻하게 가르쳐 줄 스승과 그들이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고매한 인격의 주변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미래의 동량이 될 우리 아이들이 내일에 대한 밝은 희망을 간직하고서 꺼지지 않는 미래에 대한 확신의 등불 하나씩을 꼭 간직하고 살 수 있으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언제나 마음 든든할 것이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은 바로 긍정적인 경험들일 것이니 말이다. 메타세쿼이아가 이 아침 나에게 주는 메시지는 세상을 향한 믿음에 대한 다짐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굳게 믿고, 간절하게 소망하고, 뜨겁게 사랑하며 살라고….

정명희(민족사관고 2학년 송민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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