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구상 시인

올해는 구상 시인 탄생(1919년 9월 16일) 90주년이 되는 해다. 2004년 작고한 그는 시인이자 언론인이었기에 탄생 9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르다.

구상 시인은 1950년 10월 천주교대구교구유지재단에서 인수한 대구매일신문의 논설위원(1951~1954년)과 상임고문(1955년 5월~1956년 1월)을 맡았다. 둘째 형 구대준 신부와 친분 있던 임화길 당시 대구매일신문 사장 신부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구상 시인은 고문을 맡은 그해 9월 14일 최석채 주필의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에 불만을 품은 단체에 의해 인쇄 시설이 파괴되는 등 대낮 테러를 당하는 피습 사건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당국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대항했다.

최 주필의 사설에 비위가 뒤틀린 여당 측 사주를 받은 테러단은 사설 정정과 필자의 해임을 요구했으나 구상 시인은 이에 불응, 대구교구(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와 사장 신부 그리고 최 주필 등과 함께 압력에 의연히 맞서 京鄕(경향)을 오르내리며 국회 증언 등을 통해 사태 수습에 발벗고 나섰다.

사태 수습 후 구상 상임고문은 동아일보에 '民主蒼茫'(민주창망)이라는 칼럼을 썼다. "민주주의는 여론정치를 본령으로 삼는다. 그래서 런던타임스의 어느 주필은 '내가 한 번 붓을 들어 그 비위를 밝히면 영국 내각은 3일 안에 도괴를 면치 못하리라'고 장담했다…(중략)…그런데 이번 大每(대구매일신문) 사건의 귀결을 판정승이라고들 하고 나 자신도 자위하고 있지만 이것을 치르고 나서 나는 여론정치의 확립이 그 얼마나 蒼茫(창망)한가를 더욱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올해 매일신문이 창간 63주년(7월 7일)과 전국 언론사 중 다섯 번째로 紙齡(지령) 2만 호(8월 4일) 발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 것도 바로 구상 시인과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울서 태어났으나 6'25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1974년까지 20년 넘게 머물며 각별한 애착을 가졌던 경북 왜관에는 그를 기리는 구상문학관이 2002년 개관했다. 그런데 지금 서울 영등포구청이 구상 시인 탄생 90주년을 맞아 구상문학상 제정 등 여러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칠곡군은 덩그렇게 문학관만 지어놓고 만족할 것인가.

정인열 중부지역본부장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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