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달구벌이야기](33)매일신문사

시대를 깨운 외침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매일신문은 1946년 3월 1일 창간되었다. 우병진 대표가 서문로에서 '남선경제신문'을 창간하였고, 1950년 8월 1일 '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면서 가톨릭계 신문이 되었다. 1958년 12월 7일 사옥을 태평로에서 남일동으로 이전하였고, 1960년 제호를 '매일신문'으로 변경하였다. 그 뒤 1981년 11월 14일 계산동 지금의 자리로 새로운 사옥을 지어 옮겨앉았다.

6'25전쟁 이후 한동안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교회가 이승만 정부와 정치적으로 반목 상태에 있었을 뿐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였다. 임화길 신부가 대표를 맡으면서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새로운 진용을 구성했다. 영남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낸 구상 시인을 상임고문으로, 편집국장을 맡고 있던 최석채를 주필로, 원로기자인 이우백을 편집국장으로 앉혔다.

구상 시인이 상임고문을 맡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새로 대표를 맡은 임화길 신부는 구상 시인의 형인 구대준(具大浚, 해방 후 북한에 머물며 포교활동을 하다가 1949년 투옥) 신부와 친구 사이였다. 그 같은 인연으로 해서 임화길 대표가 '신문에 관한 업무를 파악할 때까지만이라도 옆에 있어 달라'는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 교구본부의 특별한 요청이기도 하였다.

1955년 9월 14일, 최석채 주필이 쓴 사설이 문제가 되었다. 이른바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제목의 사설이다. 그 내용은 장관의 지방순시를 환영하기 위해 학생을 동원한 데 대한 비판인데,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국민회 경북지부로부터 기사의 정정과 함께 필자의 해임 요구가 있었고, 불응할 경우 실력행사를 하겠다는 통보까지 있었다. 이에 대해 최석채 주필의 의지가 결연하였을 뿐더러, 교구본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와 임화길 대표의 소신 또한 결연해서 일축하고 말았다.

그로 해서 대낮에 신문사가 습격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회 경북지부 차장 김민과 자유당 경북도당 감찰위원장 홍영섭이 이끄는 행동대원 20여 명이 9월 14일 대낮에 신문사를 습격하여 조판용 문선 활자판을 뒤엎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는 등 시설물을 파괴했다. 그와 함께 최석채 주필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였다.

상임고문이던 구상과 편집국장이던 이우백 등은 서울로 올라가 각 언론기관에 호소하는 한편, 국회에 소청을 제기했다. 그러자 국회의 여당 측도 체면 때문에 이를 받아들여 현지 조사단을 파견하게 되었고, 자유당측에서 김상도(위원장), 최창섭, 윤용구 의원과 야당 측에서 손권배(민국당), 문종두(무소속), 이우출(무소속) 의원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현지 조사를 마친 여야 의원의 보고는 서로 달랐다. 윤용구 의원은 여당 소속이면서도 테러행위를 규탄하였으나, 최창섭 의원은 '사전 통고를 한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오, 그들의 애국심은 훈장감'이라는 발언을 해서 세상에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당시 교회의 큰 어른으로 존경받던 서정길 대주교가 수감 중이던 최석채 주필을 면회했다. 그 자리에서 서 대주교가 "크게 잘못한 일이 있느냐"고 최 주필에게 물었다. 그러자 "추호도 거리낄 일이 없다"고 답하자, "그렇다면 소신껏 하라. 내가 적극적으로 후원하겠다"며 격려하였다. 그 뒤로 서정길 대주교가 최석채 주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당시 전국의 주요 신문과 언론인들은 한목소리로 매일신문을 도왔다. 여당에서도 마지못해 주동자들의 구속과 경찰국장을 경질하는 수준에서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최석채 주필은 구속당한 채 한 달여 기간을 고생하다가 기소되었고, 1956년 5월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렇지만 신문사는 그에 따른 피해와 출혈로 오랜 기간 운영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우리 나라 신문 역사에 길이 남을 교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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