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적이던 마음은 걸어 들어가 입원한 그날뿐이었다. 이튿날부터 내리막길로 치달았고 어머님은 나흘쯤 지나자 부축 없이는 걸을 수도 설 수도 없었다. 속옷을 내리는 일도 변기에 앉는 일도 불가능했고 숟가락은 들 수 있었지만 반은 흘렸다. 의사는 환자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낀다고 했다.
파도 타기 하던 증상도 3개월을 정점으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건만 뇌 질환의 또 다른 복병인 치매까지 왔다. 돌아가신 지 10년도 넘었건만 당신 남편이 살아계신 줄 알았고, 20, 30년 전으로 어느 곳이던지 당신이 가고 싶은 곳만 언제고 마음대로 다니시는 것 같았다. 현실감은 없었다.
치매는 여든여덟 노인을 열아홉 수줍은 처녀로도 만들었다. 목사님이 면회 온 어느 날, 어머님은 내게도 말하지 않았던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목사님, 내가 팔십이 넘었는데 하느님께서 복중에 태아를 주셨습니다. 남사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요?"
"……."
고개를 푹 숙인 채 복중의 태아를 조심스럽게 감싼 두 손으로 임신을 고백하는 어머님의 모습은 처녀가 애를 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배에 가스가 찼을 때였었는데 며칠 동안 몸조심하느라 침상에서 내려오지도 않은 때였다. 입덧도 했다. 먹고 싶은 것이 많아졌고 까다로워졌다. 갑자기 먹고 싶은 게 생기면 구해 오라고 떼를 썼고, 시어머님의 때 아닌 임신 때문에 나는 한겨울에 딸기를 찾았고 도토리묵이 아닌 메밀묵을 구해야 했지만 며칠 뒤 배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입덧은 그나마 짧게 끝났기에 귀여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 후로 가끔 "어머님, 아기는요?" 하고 물으면 웃고 말았다. 부끄러운 웃음이었다.
그 무렵엔 하루도 빠짐없이 아기처럼 내가 당신 곁을 지키기를 바라고 나만 보셨다. 내 일상은 병원 생활이 전부였다. 울고 싶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머리 위로 나만 따라다니는 먹구름 같은 현실이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고 나는 지쳐있었다. 아픈 환자보다 성한 나 때문에 울었다. 하지만 나는 건강한 며느리였고 가족이었기에 무게중심이 되어야 했다. 그건 내게 주어진 삶이었고 어머님의 선택이었다.
우리 앞에 닥친 불행이 컸지만 육체적 장애와 정신적 불행감을 어머님이 잘 견디고 계신 것처럼 나도 견디어내야 했다. 어머님의 믿음과, 가족들의 기대와 배려 때문에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족은 그런 것이었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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