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라는 진부한 수식어가 이처럼 절절하게 와 닿는 영화를 만난 적이 있던가. 영화 '애자'는 철저하게 관객을 객석에만 붙잡아 앉혀둔다. 억지로 감정이입을 하라고 재촉하지도, 찡한 배경음악을 깔아서 억지 울음을 터뜨리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관객은 그저 객석에 앉아있고, 영상은 스크린을 비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관객은 어느새 애자가 되고 엄마가 된다. 영화사에 길이 빛날 역작이라거나, 한국 영화의 저력을 보여준 새로운 시도라는 수식어는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그저 우리 영화다. 엄마와 딸을 다룬 영화일 뿐더러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이다. 촉촉이 젖어드는 '애자'의 감정선으로 들어가 보자.
◆웃다가 울 수밖에 없는 영화
영화 중반까지 "까르르" 웃던 관객들은 후반부로 넘어가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마 집에서 혼자 봤다면 소리내어 꺽꺽거리며 울었을 터이다. '애자'는 슬프면서 아름다운 영화다. 떠날 수밖에 없는 엄마와 보내야만 하는 딸이 나온다.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면 언젠가는 떠난다. 예정된 헤어짐이지만 그때가 언제쯤인지 모르기에 우리는 준비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빚어지는 영원한 이별. 그것을 늘상 준비하며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예정돼 있으되 준비가 없었기에 더욱 아픈 이별. 그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이별이라면, 이별 뒤에 밀려드는 슬픔과 괴로움은 헛헛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후회 때문이리라. 돌이킬 수 없다는 그 막막함이란.
열아홉 살 고교생 박애자와 수의사인 엄마 최영희.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대사 한 마디가 떠오른다. 허구한 날 속만 썩이는 자식에게 부모들은 말한다. "저건 자식이 아니라 웬수야 웬수." 소설가가 되고픈 꿈 많은 소녀 애자는 엄마에게 웬수 덩어리다. 한 번도 전교 10등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애자가 대학 진학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엄마. 이유는 이대로 가면 출석일수가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매일 아침 도시락 싸들고 학교 가는 아이가 결석이 웬말이냐는 엄마의 추궁에 담임 선생님은 비만 오면 결석이라고 말해준다. 비가 오는 날은 바닷가에 나가는 애자. 이유는 비만 오면 공부가 안 되기 때문이라서. 엄마와 딸 사이의 깊은 골을 암시한다.
◆엄마는 딸을 닮았다
엄마들은 흔히 말한다. "세상에 나보다 내 자식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있어? 내 뱃속으로 나온 놈을 내가 몰라?". 자식은 말한다. "엄마가 나에 대해 뭘 알아? 내가 엄마 하라는대로 고분고분 사니까 그게 다 인줄 아나보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가 진짜 바라는 게 뭔지 엄마는 알아?" 늘 함께 붙어있지만, 늘 같은 쪽을 바라보는 듯 하지만 서로를 모르는 두 사람. 바로 부모와 자식이다. 어머니와 딸이 그렇고, 아버지와 아들이 그렇다. 그리고 엄마 최영희와 딸 박애자가 그렇다. 앞을 보라는 엄마와 나를 봐달라는 딸.
10년 세월이 흘러 부산에 살던 모녀는 헤어졌다. 소설가를 꿈꾸는 딸은 스물아홉 살이 되도록 등단조차 못한 채 서울서 살고 있고, 엄마는 몇 해째 딸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김치만 열심히 보내고 있다. 애자는 여전히 사고뭉치다. 멀쩡히 길을 잘 가다가 골목에서 돈을 뺏는 여고생들과 시비가 붙어 경찰서 보호소에 갇힌다. 그냥 시비만 붙었으면 애자가 아니다. 몽둥이로 여고생들을 두들겨 패 전치 4주의 상처를 입혔다. 처음에는 자초지종도 듣지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린 엄마는 결국 애자를 빼내기 위해 서울로 찾아온다. 그래도 딸은 딸이니까. 진단서를 내미는 여고생들과 합의를 보는 자리. 엄마는 멀쩡한 애자도 상처를 입었다며 똑같이 전치 4주짜리 진단서를 내놓는다. 그러면서 덧붙힌 한 마디. "어금니가 나갔는데, 하나에 200만원씩이니까…." 실컷 두들겨 패놓고 오히려 합의금을 받은 엄마는 애자와 반반 나눠갖는다. "썩은 이빨 빼놓고 돈 챙겼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니냐?"고. 애자더러 사고뭉치라고 욕할 것도 없다.
◆배우 김영애와 최강희의 빼어난 연기력
애자의 삶도 참 고달프다. 서울에서 3년이나 만난 애인은 하고많은 날 바람 피우다 애자에게 들켜서 골치를 썩힌다.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되는가 싶더니 고교 시절 다른 대회에서 입상한 작품을 내놓았다며 '자기 표절'이란다. 공부 잘하는 자기는 놔두고 오빠만 혼자 유학 보낸 것도 내내 섭섭하다. 소설가를 꿈꾸는 자신을 몰라주고 시집 가라고 성화를 부리는 엄마도 마뜩찮다.
부모는 자기를 닮은 자식에게 더욱 엄격한 법이다. 행여 자신이 걸었던 전철을 되밟을까봐 늘 노심초사다. 바로 애자가 그렇다.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살아가겠다는 딸이 안쓰럽고 서운하다. 오빠에 대한 각별한 사랑은 보상 심리다. 사실 영화 속에서 엄마와 애자의 갈등의 단초는 바로 교통사고였다. 아빠의 죽음을 가져온 교통사고. 그로 인한 오빠의 장애(애자의 오빠는 한쪽 다리를 조금 전다). 하지만 엄마의 가슴 속 깊이 생채기로 남아있는 그 아픔을 애자는 알 턱이 없다. 엄마와 애자의 건널 수 없는 강이다.
하지만 죽음은, 그리고 이별은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병이 깊어 수술조차 할 수 없는 엄마와 자동차로 떠난 마지막 여행길.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며 엄마는 고통 속에도 "참, 곱다"며 미소 짓는다. 삶에 쫓겨 살아왔던 엄마와 제 살길 찾기에 바빠 엄마와 이렇게 여행 한 번 떠나지 못했던 애자. 바로 우리 모습이다. 관객들은 벚꽃잎 날리는 그 장면에서 소리 죽여 흐느낀다. 하루 밤 묵게 된 산장. 고통에 못 이겨 잠에서 깬 엄마는 주사를 놔서 스스로 죽음의 강을 건너려 한다. "가지 말라"며 애원하는 애자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보내도". 애자가 시집 가는 것도, 소설가로 성공하는 것도 보지 못하지만 엄마는 떠난다. 그게 우리 삶이니까.
영화 '애자'는 배우 김영애와 최강희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자칫 신파로 흐를 뻔한 영화를 뛰어난 연기력으로 채워주었다. 정기훈 감독은 엄마와 딸이 갖는 특유의 감정선을 무리하거나 과장됨 없이 스크린에 담아냈다. 올가을 엄마와 딸이 함께 봐야 할 영화이고, 남자들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봐야 할 영화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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