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능소화 붉은 집

권세홍 지음/만인사 펴냄

권세홍의 시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다. 그의 시집 '능소화 붉은 집'에 묶인 시는 그렇게 읽힌다. 시인은 자신이 서 있었던 자리, 서 있는 자리, 서 있고 싶은 자리에 대해 노래한다. 그의 시는 물리적 공간과 시간적 공간을 경계 없이 오고 간다.(현재적 인간에게 시간과 공간은 구분 없는 하나이기도 하지만.)

'(상략)스무 살 이후로 밥의 추억이 없다/ 훈김 서린 봉창으로 저물던/ 저녁은 다시 오지 않는다/ 장엄하게 타오르는 노을 앞에서도/ 추억은 햇반처럼 녹을 줄 모르고/ 더 이상 사람도, 소나 개도/ 저녁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추억은 햇반처럼- 중에서.

시인은 저녁 앞에 무릎 꿇던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말하지 않는다. '저녁 앞에 무릎 꿇던 시절'이 틀림없이 있었으나 이제 배고픈 시절은 가고 없다. 배고픈 시절과 함께 추억도, 젊음도, 경외심도 떠났을 것이다. 그것은 좋거나 나쁘거나 혹은 인정하거나 말거나 할 일은 아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고, 이제 그 시절과 우리는 작별했다. 시인은 다만 지난날을 기억하며 '시간의 강물'을 오르내릴 뿐이다.

'낯선 골목에서 만난/ 한때 살았던 것 같은 그 집/ 원이엄마 편지 행간을 물들인/ 능소화 붉은 꽃그늘처럼/ 서까래나 아자문살에/ 경어체 옛말이 묻어나는 집/ 반쯤 열어둔 대문으로/ 바람이 들락거려도 짖지 않는/ 늙은 개가 사는 집/ 주인이 집 비운 사이/ 노을이 회벽에 마음껏 덧칠해도/ 능소화처럼 잠시 붉어지기만 하는/ 그 집.'-능소화 붉은 집-

이 시는 지은이의 현재적 공간이자 심리적 고향인 안동을 무대로, 그 공간에서 애절한 사랑을 노래했던 한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시인의 사랑과 추억, 어쩌면 바람을 노래하는 듯하다.

낯선 골목에서 마주친 옛집, 어쩌면 나는 그 집 어디선가 살았을지도 모른다. 여름날 그 집 담에 기대어 능소화가 붉은 꽃을 피울 때 '경어체'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남편과 아내. 주인이 집을 비워도, 반쯤 열린 대문으로 바람이 들락거려도, 노을이 회벽을 마음대로 덧칠해도 개는 짖지 않았고 능소화는 붉었다. 내가 그 집에 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까.

'가송 지나 청량산' 역시 시인의 심리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佳松(가송), 그 이름에 풍경 포개지고/ 풍경에 내 마음 포개지고/ 풍경 속/ 노루 뒷간만한 정자 하나/ 눈에 밟히고 밟히다/ 그 자취도 영영 쓰러지고/ 봄 가고/ 여름 가을 가고/ 겨울 지나/ 가송 지나/ 청량산.'-가송 지나 청량산-

봄 가고 여름 가을 겨울 가고…, 세월 지나니 눈에 밟히던 자취도 영영 스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가송 지나니 어김없이 청량산이 나타난다. 영영 스러지고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가송은 안동 북쪽 청량산 인근의 강마을이다. 빼어난 조선의 미의식을 보여주는 고산정이 있고, 그 너머 청량산은 조선 유학자들의 성지다. 시인 권세홍은 바로 이곳을 세거지로 대대로 이어온 안동 권씨 후손이다.

시인은 시간과 공간을 건너고 가로질러, 이제는 스러진 줄 알았던 그 옛날을 심미적 눈으로 들여다본다. 세월과 강물은 흐른다. 오늘의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니다. 그러나 마르지 않고 흐르니 그 강은 여전히 그 강이다. 89쪽, 7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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