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물림상

임금님이나 대갓집 반상차림을 상업화한 게 오늘의 한정식이다. 이것저것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상차림이다. 지금이야 어디를 가나 그게 그거지만 예전에는 기르고 잡은 물산이 다르고 사람들의 취향이 같지 않았던 까닭에 상차림도 지역별로 제각각 달랐다. 그 중에서도 물산이 풍부했던 남도의 한정식은 양과 질에서 다른 지역을 압도했다. 상다리가 휘어질 양과 가짓수에 온갖 진미가 차려졌다.

당연히 임금님 수라에 버금가던 조선시대 8도 관찰사의 밥상 중에서도 전라감사의 밥상은 유별났을 터다. 하루에 소 한 마리를 잡았다는 말까지 전해질 정도다. 온갖 나물과 고기에 계절별 생선이 빠짐없이 올라왔다. 그 많은 음식을 전라감사는 매일 어떻게 먹어치웠을까. 그러나 감사가 실제 먹을 수 있는 것은 밥과 국에 기본적인 나물뿐이었다. 밥그릇 국그릇을 치우면 수저를 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이 먹은 뒤 상을 물렸다.

물린 밥상은 이방을 비롯한 6방 아전과 비장 등 벼슬아치에서부터 기생 하인까지 관아의 모든 식솔들이 벼슬에 따라 차례대로 물려가며 먹었다. 모양새로야 전라감사는 매일 진수성찬을 받았지만 실제는 그림의 떡을 받은 셈이다. 차려진 음식을 여기저기 손을 대며 과식을 했다가는 '다 처먹었다'는 욕이 쏟아졌다. 벼슬 높은 감사가 제 배만 채우려 욕심을 냈다는 비난이었다.

그 시절 고위 관리들은 욕심을 누르며 참아야 했다. 내가 먹고 나면 아랫사람들이 먹을 게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야 했다. 여염집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 손자가 함께 살던 시절 제일 먼저 밥상을 받는 할아버지는 늘 입맛이 없다며 맛난 반찬은 대는 둥 마는 둥 일찍 수저를 놓았다. 물린 상을 앞다퉈 나눠 먹은 어린 손자들이야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지만 그런 할아버지를 따르고 기다리며 살았다.

고위 공직 내정자들의 욕심 어린 행태들이 청문회장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잘 살고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법을 만들거나 법을 집행한 사람들의 욕심은 보는 이를 씁쓸하게 한다. 법이란 필요에 따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건지 아리송하다. 먼저 받은 밥상을 내 것이라고 우기며 마구 수저를 댄 꼴이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생겨난 게 아닐까.

서영관 논설위원 seo123@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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