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깊은 터널을 지나 온 유럽인들은 그들의 시대를 '모던'이라고 불렀다. 원래 '모던'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지금'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시간을 일컫기 위해 썼던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이제 특정한 역사의 마디를 가리키는 한정된 의미에 갇혀 있다. 언제부턴지 우리는 지금의 시대를 모던이라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모던 이후의 사회, 흔히 말하는 '포스트모던'을 살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1990년대 초에 그랬던 것과 같은 격렬한 저항과 논란은 더 이상 없다.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시간 축을 따라 흐르는 연속성을 지닌다. 마치 1999년 12월 31일과 2000년 1월 1일이 단지 24시간의 차이밖에 없었던 것처럼,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단지 수사적 구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하루가 모여 한 달, 한 해, 한 세기가 된다. 정확히 언제부터 포스트모던이냐는 물음에 답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삶이 전형적인 모던의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은 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곳곳에 시멘트 포장이 깨져 있는 마당을 끼고, 장독대를 경계로 이웃과 붙어살던 1970년대의 지배적 주거 형태를 위브 더 제니스를 상징으로 하는 요즘의 주거와 같이 놓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고작해야 몇 개의 AM 라디오 채널과 세 개의 텔레비전 채널이 전부였던 1970년대의 미디어 환경과 쿡하면 다 되는 지금의 미디어 환경을 같다고 볼 수는 없다.
지금 변하고 있는 세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 이야기는 아톰의 시대에서 비트의 시대로, 산업자본의 시대에서 지식과 정보의 시대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의 현재적 징후는 무엇보다 '컨버전스'라는 말로 요약되는 문화적 환경의 변화양상이다. 이 말은 흔히 '융합'이라는 말로 번역되지만, 그 뉘앙스와는 다르게 여러 문화 요소들 특히 미디어들의 '화학적 결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복수의 문화들 혹은 복수의 미디어들이 나름의 발전을 이루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 사이의 구분이 희미해져 결국 이들 낱낱을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해지는 상황이 '컨버전스'다. 지금 컨버전스는 다른 문화들 다른 미디어들의 다발이며 묶음이다. 요즘 흔히 이야기되는 '방송통신융합'은 컨버전스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컨버전스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문화적 지형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헨리 젠킨스는 이를 집단지성, 참여의 문제와 연관 짓는다. 컨버전스에 의해 변화된 커뮤니케이션 환경이 개별화된 지식의 집합적 발현을 가능케 할 뿐 아니라, 대중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모폐인과 네멋폐인에서 시작된 참여적 시청자 문화는 컨버전스 시대를 알리는 중요한 문화적 징후였으며, 우리의 삶이 이미 상당히 그 안에 깊게 발을 담그고 있음을 알려준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 인터넷 게시판에 감상평을 올리고, 메신저로 관련 정보를 교환하며, 핸드폰 문자로 번개를 공지하고, 카페를 하나 빌려 지난 방송분을 공동 관람한다. 이들은 다양한 미디어들을 개별적인 낱낱의 대상으로 식별하지 않고, 이를 상호연관된 일종의 미디어 네트워크로 묶어낸다. 소위 컨버전스 미디어가 나오기도 전에, 대중매체의 수용자들은 이미 컨버전스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
컨버전스는 자유, 참여, 다양성, 창의성과 관계가 있다. 이 네 가지 가치는 컨버전스의 조건이자 결과다. 물론 이러한 가치들은 개방과 공유의 마음속에서 성장한다. 열면 커지고 나누면 많아진다. 하루하루 밀려가다 보면, 어느새 컨버전스 속에서 살고 있겠지만, 개방과 공유의 마음을 갖고, 나름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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