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건너는 여대생의 긴 생머리에 남은 물기가 햇살을 받아 더욱 싱그러워 보이는 아침. 초등학교 일학년 막내는 이른 등교로 아침잠이 모자라 코 골며 승용차 뒷자리에 잠들어 있다. 그러다 "기차 지나간다"고 하자 불에 덴 듯 벌떡 일어나 앉는다. "기차 꼬리 밟으면 행운이 온다"고 해 주었더니 푸른다리 근처면 꼭 자기를 깨워 달라며 신신당부한다. 철커덕철커덕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허공에 발을 쳐들고는 마지막 꼬리를 밟는 시늉을 하며 좋아한다. 저녁이면 오늘 이런저런 행운이 있었노라고 잊지 않고 주워섬기며….
기적 소리와 더불어 꾸불꾸불, 아련히 사라져 가는 기차를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 늘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역을 찾아다녔다. 지금은 문 닫아서 더 가까이서 볼 순 없지만 몇 시간씩이고 앉아 지켜보던 추억의 고모역, 청도의 남성현역까지. 기차역을 혼자 지날 때면 아들 생각이 먼저 난다. 왜 그렇게 좋아하냐고 물으면 '기차 연구 중'이라고 한다. "그 연구가 언제 빛을 발하지?" 하고 물으면 '내가 크면 나중에…'라며 제법 어른스런 대답을 돌려주곤 한다.
'기다려줘야지!'라고 다짐한다. 무엇에든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추억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위기 잘 타는 막내. 또 다른 데 몰입하기 시작했다. 전학 이튿날 이른 아침. 산책 좀 하고 나서 학교 가자며 분위기를 잡기에 아이 손을 잡고 걸어 올라가다 발견한 학교 뒤의 커다란 못. 단산지. 그곳에 아침 햇살을 받으며 정박해 있는 노란 오리배를 보는 순간 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자기 소원이 바로 저 오리배 타 보는 것이라고. 애원하는 애를 달래다 그날 결국 학교에 지각했다.
약속한 토요일 오후 데리고 갔더니 아이의 발이 땅에 붙지 않는다. 배를 저어가며 온갖 무드에 잠기더니 결국은 해가 깜빡 질 때까지 세 번 타고는 내려와 '우리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 내일 아침 해 뜨는 것도 보고 가자'며 나를 구슬리기 시작한다. 못 말리는 녀석이다. 온 우주 어디든 자기가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배짱 한번 커서 좋다며 산을 내려왔다. 감성적인 아이의 마음속에 이 경험이 고운 빛깔 추억으로 남아 있길 바라며 오늘만은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21세기엔 성공하려면 상상력과 의욕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 가지 경험을 하여 상상력을 키워주고 그 상상력이 현실화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읽은 샴쌍둥이 분리수술 성공 의사로 유명한 존스 홉킨스의대 소아신경학 교수인 벤 카슨스토리의 자서전 속 어머니 역할이 감명 깊다. 초등학교 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 어머니는 공부하라는 말 대신에 시 구절을 읽어 주거나 유명한 사람들의 지혜로운 말을 늘 아들에게 상기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 의사는 "나의 환경이 어떻든 내 가슴에는 햇빛이 있습니다"고 한다. 먼 장래에 우리 아이들의 미래 속에 드러날 어머니의 역할은 어떠할까? 크게 생각해 보아야겠다.
정명희(민사고 2년 송민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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