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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그곳에 가고 싶다

그곳에 가고 싶다

가을비가 내린다. 지금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생각나는 장소가 한두 군데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늙는 것일까. 가고 싶은 곳이 추억 속에 더 많이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앞날보다 지난날에 더 마음을 기대는 법이니까. 비가 그치면 기온이 더 내려갈 거라고 한다. 무언가 따뜻한 것이 그리워질 때다. 갑자기 반월당 뒷골목에 있는 지짐 골목을 찾아 갔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고만고만한 술집이 붙어있고 생각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옛날 우리처럼 모여 앉아 지짐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왠지 은밀한 장소에 들어온 것처럼 마음이 푸근했다. 그곳에서는 목청이 커져도 괜찮을 것 같고 실수를 해도 눈감아 줄 것 같았다.

대학교 때 선배들의 얄팍한 주머니만 믿고 따라간 곳은 다름 아닌 막걸리 집이었다. 여학생들은 왕비다방에 가서 비엔나 커피를 홀짝거리거나 쥬니빈 다방에 가서 음악을 신청해 듣는 것이 더 좋았지만 선배들 앞에서 함부로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마지못해 따라가 앉아 있으면 기름 냄새, 시큼털털한 막걸리 냄새, 그리고 뒤쪽에서 마구 쏟아지는 욕설과 함께 술 주전자가 날아올 것 같은 살벌함도 간간이 있었던 그때, 그곳의 기억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음식의 맛과 향을 통해 과거의 기억으로 들어가는 일이 종종 있기는 하다. 청춘의 한 때, 그때를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 입에서 지짐 골목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 사실 먹을거리가 변변찮던 그 시절, 지짐 골목의 추억을 왜 모두들 잊지 못하고 있는 걸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가난했지만 청춘이 있었고 열정이 있었고 무엇보다 우리의 앞날은 지금보다 더 나아져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요즘 새로 막걸리 집에서 모임을 많이 갖는다고 한다. 막걸리 안주에는 지짐만 한 게 없지만 오래된 친구들에겐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추억이란 안주가 있다. 그래, 맞다. 우린 추억을 먹고 마시고 싶어 그곳에 가는 게 분명하다.

'순대 속 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한다/우리는 늘 하나라고 건배를 하면서도/ 등 기댈 벽조차 없다는 생각으로/나는 술잔에 떠있는 한 개 섬이다/ 술 취해 돌아오는 내 그림자/ 그대 또한 한 개 섬이다' (신배승 시·장사익 노래 '섬') 노래처럼 문득 쓸쓸해지는 퇴근길, 비까지 온다면 지금 가고 싶은 곳에 당장 가보시라.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주 좁을 테니 반드시 차를 두고 가야만 들어갈 수 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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