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길에는 '희노애락'이 있었다. 주막, 성황당, 구구절절 노랫가락이 길손들과 늘 함께했으리라.
제2관문을 지나면 길 옆 자연석에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바로 문경새재 아리랑비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애기 손길에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문경새재 넘어갈 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삶을 가장 잘 함축한 노래다. '새조차 넘기 힘들다'는 새재의 고개에도 아리랑이 서린 것이다. 문경새재아리랑은 그 명성만큼이나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가 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로구나'라는 진도아리랑의 첫 대목에도 등장한다. 새재아리랑을 부른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새재를 넘나들며 곶감장사를 했고, 일본 북해도에 징용으로 끌려가 탄부생활을 할 때도, 농사를 짓고 나무를 할 때도 새재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새재아리랑은 서민의 삶을 오롯이 담아내는 예술적 그릇이었다. 노래에서 보듯 아리랑 고개는 넘어야할 고개라는 점에서 고단한 삶의 고개요, 님이 넘어가신 고개여서 이별의 아픔을 담은 고개였다. 또한 사람마다 삶의 곡절이 제각각의 의미로 새재에 젖어 있는 것이다.
새재에는 '길위의 민속'이 있었다. 새재의 첫 관문 오른쪽 성곽 안에 있는 성황당이 그러하다. 마을 단위의 성황당으로선 건물의 규모가 크고 매우 훌륭했다. 지금도 전국 각지의 무속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 성황당에는 조선시대 길손들의 발품과 믿음이 담겨 있다. 길손들은 성황당에서 여로의 무사안전과 장원급제의 꿈, 거부의 꿈, 사랑하는 가족·연인과의 아름다운 재회를 빌었다.
새재 성황당은 조선시대 때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생겨났다. 건립 초기에는 '조령진'이라는 관에 의해 제사가 주도되면서 일종의 군사 종교시설이었다. 하지만 조령진이 잦은 존폐를 겪자 나중에 주민들이 성황당 제사를 모시게 됐다. 이후 고갯길에 자리잡은 성황당은 길손들의 쉼터이자 소원을 비는 곳으로 바뀐 것이다.
고갯길에는 어김없이 원한을 품은 처녀귀신 이야기가 등장하니, 이 처녀의 원한을 사지 않으려면 그곳을 통행하는 나그네의 남다른 정성이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새재 성황당은 지금도 길손들의 동반자요, 든든한 후원자를 자임하고 있다.
성황당을 나와 다시 2관문으로 가기 전에 있는 주막과 조령원터로 향했다. 주막과 역(驛)·원(院)은 길손들의 또 다른 친구였다. 조령원터를 조금 지나 새재길 왼쪽 편에 자리한 주막은 지금은 술밥을 팔지 않는다. 대신 새재를 찾는 이들의 임시 쉼터이자 옛 정취를 주는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주말이나 휴일, 관광객들을 상대로 주막 체험 이벤트도 하고 있다.
주막 마루에 걸터 앉아 눈을 감고 잠시 길손으로 돌아갔다. 옛 길손들이 문턱이 닿도록 드나들었던 주막 풍경이 머리 속에 담겼다. 산 넘고 강을 건너 새재 고개까지 넘어 파감치가 된 길손들. 겨우 주막 앞에 다다라 "주모, 방 있소?" 라고 외친다. 피곤함이 뼛속까지 녹신녹신 배어들고, 시장기는 주린 배를 더욱 다그친다. 그리곤 잠시 후 밥상을 받아들자마자 뚝딱 해치운 국밥 한 그릇에 겨우 시장기가 물러난다. 하지만 이번에는 녹초가 된 몸이 길손을 눕히고야 만다. 좁은 봉놋방에는 먼저 들어온 봇짐장수가 아랫목을 턱하니 차지하고 있는데다 식구가 10명이나 되니 칼잠을 자야할 처지다. 어쩌랴. 깊은 산 속에서 이슬을 피할 곳이라곤 주막뿐이니 문지방 끄트머리에라도 겨우 엉덩이를 걸칠 수밖에. 밤이 깊어가면 몇몇은 이내 말을 트고 친구가 된다. 술상이 들어오고, 길 정보가 쏟아지고, 즉석에서 상거래가 이뤄지는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친다.
새재의 주막촌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무척 번성했다. 나그네, 아낙, 상인,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주민들에 따르면 상푸실(상초리), 중푸실(중초리), 하푸실(하초리) 등 새재의 3개 마을은 온통 주막촌이었고, 옛 주막의 먹을거리가 점차 사라져갔지만 1960년대까지 막걸리와 돼지고기, 산채 비빔밥을 파는 주막이 마지막 명맥을 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옛 주막이 사라졌다. 주막은 '걷는 문화, 나그네 문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걸으면서 생활하던 옛 방식들이 사라지면서 주막도 더불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잊혀진 옛 풍물인 주막 자리를 지금은 현대식 음식점들이 대신하고 있다.
주막은 역(驛)과 원(院)이 쇠퇴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주막 문화는 17세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때까지 우리 삶과 함께했고, 그 이전인 조선 초·중기의 주막 기능은 바로 '역'과 '원'이었다.
역은 조선시대 가장 큰 육상 교통기관이다. 중앙과 지방 간의 어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물자를 운송했다. 또 사신이 왕래할 때는 안내와 접대, 숙박의 편의를 제공한 곳이다. 길을 오가는 이들이나 범죄인을 검색하는 역할도 역의 몫이었다.
조선에는 41역로(驛路), 524속역 체제의 전국적인 역로망이 있었는데, 역로를 관장하는 찰방역을 중심으로 속역을 뒀다. 문경새재에는 바로 찰방역인 유곡역이 있었다. 유곡역은 영남대로의 '허브'였다. 영남에서 서울을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 요지에 유곡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광공 홍귀달은 유곡역을 사람의 목구멍에 비유한 적이 있다. "모든 음식물이 넘어가는 목구멍에 병이 나면 음식을 통과시킬 수 없고, 음식이 통과하지 못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것처럼 유곡역은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했다.
유곡역에 딸린 속역은 18개였다. 지금의 상주, 구미, 예천, 의성, 군위 땅에 걸쳐 있었고, 조선후기 역리(역 종사원)가 3천명, 노비가 800여명에 달했다. 유곡역 규모와 중요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곡역은 종6품 찰방이 관장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의 명장 곽재우가 유곡찰방을 역임했고, 점촌의 옛 유곡역 자리에는 암행어사 박문수의 선정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역과는 달리 원은 상인이나 선비 등 길손들의 숙식을 위해 설치된 시설이다. 조선 초·중기 상업과 민간 교통 발달에 중추 역할을 했던 장소다.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문경 지역에는 새재원(조령원), 요광원, 관음원, 관갑원, 회연원, 개경원, 불정원, 보통원, 동화원, 견탄원, 화봉원 등 무려 11개의 원이 있었다. 이들 중 조령원, 요광원, 관음원, 화봉원은 지금의 문경새재 길목에 자리했다. 얼마나 많은 길손들이 문경새재를 통해 영남과 한양을 오갔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길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이웃이다. 지금 길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옛 길을 복원하고 있다. 전국 최고의 길을 가진 문경이 이젠 새재를 넘어 영남대로길을 새로 닦아 보는 것이 어떨까?
이종규기자 문경·권동순기자 사진 이채근기자
자문단 안태현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정옥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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