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온가족 놀이요?…아빠는 골프, 엄마는 레저"

시대별로 본 한가위 쇠기…젊은 세대 연인·친구가 우선순위

대한민국 건국 1세대들에게 추석과 설날은 '1년에 2번 목욕하는 날' 또는 '모처럼 맛있는 음식 구경하는 날'로 기억될 것이다. 2세대들에게 명절은 산업화 이후 뿔뿔이 흩어져 살던 형제·자매들이 고향에서 부모님과 정을 나누는 소중한 자리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지만 특별히 명절을 의식하지 않거나 또 다른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3세대들에겐 그저 휴식의 개념이 더 강한 것 같다. 따라서 이들에게 명절은 새로운 세태가 만들어지고 반영하는 특별한 날일 뿐이다. 핵가족 위주의 여행 풍조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싱글족들의 나홀로 추석나기, 설나기가 등장하기도 했다. 부모와 친척·형제와의 만남이 친한 친구나 취미모임에 밀려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명절에 모여봐야 이런저런 일로 서로 얼굴 붉히고 며느리들은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리니 굳이 모여봐야 소득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각자 알아서 명절을 보내는 풍조가 더욱 두드러지는 추세다. 아버지는 골프치러, 어머니는 트레킹, 자녀들은 레저를 즐기러 따로 움직인다. 추석 명절이 아니라 여름휴가의 연장선상이다. 부모에게는 꽤 값나가는 추석선물 하나 보내고 전화 한 통이면 끝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여전히 추석은 추석이다. 옛날 정겨운 추석 그대로의 기분을 느끼는 전통적인 분위기를 내는 곳도 적잖다. 오순도순 모여 정을 나누고 차례를 지내고 조카들끼리 모여서 노는 모습이 20~30년 전이나 변함없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변한 추석쇠기 백태를 들여다보자.

◆가족여행 '콩가루라도 좋다'

대구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김모(49)씨. 그는 추석과 설날에 부모를 찾으러가지 않은 지 10년 가까이 됐다. 차라리 명절보다 1년 중 본인이 가고 싶을 때 어머니를 한 번 찾아뵙는다. 가족이 함께 가지도 않는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보는 것을 가족들도 좋아하지 않고 어머니 역시 부담스러워 하시기 때문에 '굳이 올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

대신 김씨 가족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있는 친구와 함께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떠난다. 가족 구성원의 연령대도 비슷하고 서로 마음도 통해 친척보다 더 낫기 때문. 2박3일로 맞춰서 떠나며 도착하면 아버지끼리는 골프치러 나가고 어머니끼리는 트레킹이나 가벼운 산행을 즐기며 자녀들끼리도 조를 맞춰 MTB 등 레저스포츠를 즐긴다. 누구하나 어색하지 않으며 연휴를 즐기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경북에 사는 한 형제는 유산으로 인한 분쟁 때문에 '서로 같이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다'며 형이 추석이 고향에 가면 동생은 안 가고, 동생이 가면 형이 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없이 혼자사는 어머니는 늘 맘이 편치않다. 그래도 법정다툼까지 한 두 형제는 이미 도를 넘었기 때문에 화해시키려해도 소용이 없다. 명절에 가는 않는 쪽은 아예 가까운 곳으로 해외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취미생활이나 공연관람

박정찬(30·대구시 달서구)씨에게 추석이나 설날은 취미생활이나 공연관람의 최적기. 그는 큰집인 자신의 집에 친·인척들이 모이지만 잠시 올 때만 인사를 하고 이내 밖으로 나간다. 그동안 못봤던 영화도 보고 추석에 멀리가지 않는 친구들끼리 모여 가까운 곳에 놀러가거나 탁구나 당구, 볼링 등을 즐긴다. 그는 친척들이 많이 올 때는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며 부담없이 즐기러 나가 아예 친구집에서 자버리기도 한다.

한 사진동아리 모임은 매년 추석 전날이나 그 다음날 대구 인근의 촬영하기 좋은 곳으로 떠난다. 차례만 지내면 집안에서 할 일도 없어 오히려 이때 더 많은 회원들이 모인다. 한 회원은 "추석이라고 해봐야 별로 달갑지 않다"며 "특히 우리 집안은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형제 간에 빈부격차가 커 차라리 안 만나는 것이 낫다"고 털어놨다.

아들 많은 집안에는 며느리들끼리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러가는 경우도 적잖다. 특히 요즘 신세대 집안은 처가 위주로 운영돼 사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술도 한 잔 하러 다니며 부부동반으로 영화감상이나 게임을 즐기기도 한다.

대구 수성구에 사는 강영혜(66·여)씨는 "요즘은 신세대 며느리, 사위들이 고스톱도 잘 못치고, 그렇다고 서양식 카드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윷놀이는 시시하고 재미없다며 자연스레 저희들끼리 모여 밖으로 놀러나가는 것"이라고 불평했다.

◆우린 '정겹게 다 모여요'

안동시 동부동 한 아파트에 사는 한희숙(83) 할머니는 얼마전 영주 풍기에서 인삼밭을 하고 있는 친한 이웃집을 다녀와 홍삼을 사왔다. 안동시내 탕제원에 맡겨 홍삼을 엑기스로 정성껏 달여내고 있는 이 할머니는 이번 추석에 고향집을 찾아 올 자식들에게 선물로 홍삼 엑기스를 건네 줄 요량이다.

큰아들(53)과 둘째(46), 세째(42) 아들에다 며느리 셋, 손주 넷 등 모두 열 명에게 줄 홍삼은 10박스. 박스당 8만원씩인데 용돈을 모아 고쟁이주머니에 숨겨둔 돈을 몽땅 털어 80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들였다.

이 할머니의 '올인'식 추석준비는 올해는 신종플루 때문에 추석쇠러 가는 것조차 꺼린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다. 그래서 면역력을 높이는데 좋다는 홍삼를 달여 놓고 자식들에게 이미 통보까지 해 뒀다. 이번 추석때 오면 직접 달인 진품 홍삼엑기스를 주겠으니 신종플루 걱정말고 고향집으로 '어서오란' 의미다.

30여평의 아파트에서 혼자지내는 이 할머니에겐 추석과 설날 두 명절 때만이 자식들의 얼굴을 다 볼 수 있는 날. 할머니 마음은 신종플루가 아무리 기승을 떨어도 자식 손주들이 모여 오순도순 차례상을 마련하고,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 벌초와 성묘를 해 오던 매년 가족들의 추석쇠기 행사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까짓 신종플루 때문에 추석을 쇠지 않는다니 어디 말이나 됩니까? 어디 고향집 안 가고 딴데가면 신종플루 안 걸린답니까?"

◆추석 스트레스 1위는 '돈'

이런 다양한 추석쇠기 백태와 더불어 경제난 탓인지 올해 추석 스트레스 1위는 역시 돈문제인 추석쇨 비용부담이 차지했다. 인크루트가 최근 대구경북 직장인 6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42.9%가 차례준비, 선물 등 돈이 문제며 13.4%는 결혼, 취업, 출산 등에 관한 친지들의 성화를 들었으며 12.6%는 귀경·귀성길의 지옥같은 교통난을 들었다.

추석 지출 비용에 대해서는 10만원대가 34.1%로 가장 많았으며 20만원대가 30.9%, 10만원 이하가 18.1%나 돼 가계마다 어려운 경제상황을 실감케 했다.

인크루크 한 관계자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 추석을 쇠는 방법도 다양해지고 또 추석 때마다 받는 스트레스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며 "우울하게 집에만 있을 수도 없으니 가족끼리, 친구끼리, 취미생활에 따라 추석을 보내는 것도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안동·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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