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가족사는 더없이 비극적이었다. 안 의사 장남은 어릴때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차남은 부끄럽게도 친일(親日)을 했다. 가족은 중국, 러시아 등지를 유랑하며 고생했다.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둔 탓에 집안이 풍비박산난 전형적인 사례다. 그러나 안 의사 일가친척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자랑스런 집안이다.
◆장남마저 살해당하다
안 의사는 부인 김아려 사이에 1녀 2남(현생, 분도, 준생)을 뒀다. 안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순국할 당시 어머니 조마리아와 부인, 세 아이는 러시아 연해주에 머물고 있었다.
안 의사가 의거 직전 일제 탄압을 우려해 가족들을 러시아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을 때 안 의사는 이미 그곳을 떠난 뒤여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황해도 해주 명문가에서 편안하게 살던 이들은 낯선 땅에서 교민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갔다.
안 의사 순국 후 인 1910년 5월 두 동생인 정근, 공근 가족까지 옮겨와 8명의 대식구로 불어났지만 남의 집에 얹혀살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족은 일제 감시를 피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코르지포→길림성 목릉현→러시아 니톨리스크→중국 상해로 옮겨다녔다.
1911년 여름 어느 날 가족이 길림성 목릉현에 살 때 장남 분도가 죽었다.
'분도가 강변에 나갔다 갑자기 비지땀을 흘리면서 배를 끌어안고 들어오며 고통스러워했다. 어머니 김아려가 당황해 "어찌 된 일이냐?'며 물었다. 분도는 '웬 조선사람이 낚시질을 하며 나를 부르기에 가까이 갔더니 과자를 먹자고 했어요. 그사람도 먹고 나도 먹었는데 이렇게 배가 아파요…." 분도는 말을 잇지 못하더니 어쩔 사이 없이 숨지고 말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낚시꾼은 일본놈들이 파견한 간첩이었다. 일본놈들은 앞으로의 일을 우려해 안중근의 후손들까지 멸족시킬 야심이었다.'
당시 유동선은 언니와 함께 안중근 집안에 문안을 갔다가 며칠 머물고 있었다. 안 의사가 유언으로 신부가 되도록 키워달라고 당부했던 장남 분도는 7세 나이로 그렇게 요절했다.
◆차남 준생의 친일행각
차남 준생의 친일 행각을 자세히 들은 것은 일본 교토에서였다.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장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교수는 "백범 김구가 환국하면서 중국 정부에 안중근의 아들을 처단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기자에게 알려줬다. 이 사실을 일본인 교수에게 듣고 있자니 낯이 뜨거워졌다. 나중에 '백범일지'(도진순 주해·돌베개출판사)를 보니 그 대목이 나왔다. 도진순 교수(창원대 사학과) 설명에 따르면 그 대목은 백범이 해방 후 구술한 것을 유족들이 보관한 추가본에 들어있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백범일지에는 백범이 해방후인 1945년 11월 환국하기 위해 상해에 머물 당시 상황이 기록돼 있다. '상해에는 이전의 독립정신을 굳게 지키며 왜놈의 앞잡이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10여명에 불과했다. (중략)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 중국 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 백범일지에는 '안준생은 왜놈을 따라 본국(本國)에 돌아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부친의 죄를 사(謝)하고 일본 총독 미나미 지로를 애비라 칭(稱)하였다'는 주석이 달려있다.
안준생이 경성(서울)에 온 것은 32세때인 1939년 10월쯤이었다. 상해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던 그는 상해 조선인의 '만선시찰단'에 포함돼 있었다. 준생은 남산에 이토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 박문사(博文寺·현 신라호텔 자리)를 찾아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이토의 차남 이토 분키치(伊藤文吉·당시 일본광업사장)를 만나 사죄했다.
10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안준생과 이토 분키치가 만나는 장면은 신문마다 대서특필됐다.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안준생의 담화도 함께 게재됐다. '호부견자'(虎父犬子)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였다.
미즈노 나오키 교수는 "신문들은 '테러리스트' 안중근의 자식과 메이지 원훈인 이토 히로부미의 자식의 화해는 내선일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떠들었다"며 "준생의 방문때 조선총독부 외사과장이 동행한 것에 미뤄 총독부가 연출한 화해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쯤 되니 백범이 준생을 '죽이라'고 했을 것이다. 안중근 가족을 돌봐온 백범으로선 지극히 당연한 분노일 것이다. 백범은 20세때인 1895년 동학에 가담했다가 패하고 안 의사 아버지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했을 정도로 안 의사 집안과 교분이 있었다.
그후 안준생은 1950년 전쟁의 와중에 귀국했다가 1952년 사망했고 그 부인과 1남2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안 의사의 유일한 손자인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권위자가 됐고 1남을 두고 있다. 김호일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은 "웅호씨는 한국에 몇차례 다녀갔으며 한국말을 잘 못한다"며 "안 의사 증손자는 미국 IT업계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안준생의 묘는 경기도 포천 천주교공원묘지에 있다.
8세때 아버지를 잃은 장녀 현생의 삶도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가족과 떠돌다 16세때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불문학과 미술을 공부했고 1960년 58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사망했다. 슬하에 두 딸을 뒀고 서울 강북구 삼각산 자락에 묻혔지만 무덤을 쓸쓸하게 방치돼 있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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