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그래서 농부들은 가을걷이를 통해 수확의 기쁨을 느끼고 삶의 풍요를 실감한다. 가을걷이는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김을 매 곡식의 성장을 돕고 가을에 결실을 걷어 들이는 과정을 통해 계절의 순환과 하늘에 대한 이치라는 철리(哲理)를 느끼게 된다. 특히 겨울 빈 들판의 '비움'은 모든 것이 사라진 휑뎅그렁한 황폐가 아니라 자신을 비워내고 빈 여백을 남겨두면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감하고 준비한다는 데서는 어떤 청빈과 순응의 미학마저 느끼게 한다. 그래서 예부터 농사는 천하지대본이고 농심은 천심(天心)인 것이다.
그저께 일간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에서 오랫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트랙터가 나락이 가득한 들판을 갈아엎는 사진이었다. 그 주위에는 흰 머리띠를 한 농부들이 '쌀 생산비를 보장하라'는 펼침막을 들고 서 있는 장면이었다.
기사를 보니 올해는 수확이 한창인 2009년산 조생종 한 포대(조곡 40㎏ 기준) 수매 가격이 4만5천 원 선이라고 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 농협의 수매가격 5만7천 원에 비하면 20% 이상 폭락한 가격이라는 것이다. 해마다 물가가 올라가는 게 일반적인 현상인데 쌀값은 내려간 것이다. 그것도 20% 정도 내려갔다니 말 그대로 폭락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가격이다.
지금까지 배추나 무밭을 갈아엎거나, 아니면 무나 배추를 추수하지 않고 그냥 들판에 내버려둬 한겨울에도 배추밭의 배추가 마치 전쟁터에서 목이 베어진 장수의 목 꼴을 하고 흉하게 서있는 농촌 풍경을 심심찮게 보아온 게 사실이다. 무, 배추에 이어 마늘밭을 갈아엎고, 보리밭에 불을 질러 그냥 보리를 태우더니 드디어 나락을 갈아엎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농촌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TV에서 두 눈에 눈물을 그렁거리며 씨앗 값도 안 나온다면서 연방 큰일 났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검게 그을린 촌부의 모습을 보니 시골에서 농사 짓는 큰누님들이 생각나서 눈물이 핑 돌았다. 뜨거운 햇빛과 대자연의 비바람 속에서 마치 자식들 키우듯 땅을 가꾸며 곡식을 길러온 저 순박한 사람들에게 현실은 너무 힘들고 가혹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평소 존경하는 천규석 선생이란 분이 있다. 일흔 넘은 분인데 대학 졸업 후 평생을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 온 분이다. 이 분은 농사 중에도 기계농 중심의 대농이나 기업농보다는 소농(小農)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소농이 농촌을 살리고 우리 사회를 살린다는 생각을 평소 갖고 있는 분이다. 소농이라면 대략 논밭 열 마지기 남짓한 농사이다. 그런데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농촌에서 이 정도 농사를 지어서는 아이들 공부시키기 힘들다. 특히 아이들이 대학에라도 가게 되면 당장 생계에 타격이 올 지경이다.
소농 규모로는 당장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지 않겠는가? 라고 회의를 드러내자 선생께서는 소농은 토지가 집중이 안 되고 고루고루 나눠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열 마지기 정도 지어도 결코 가난하지 않을텐데 농촌이 가난한 이유는 자녀교육 때문에 그렇다고 일갈하셨다. 교육에 돈 안 들어가면 농촌이 가난해질 이유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자치단체가 교육기관을 갖고 무상으로 교육하고,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교사나 교수를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사회의 독점의 구조화가 가난을 낳게 되고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농부들이라는 게 천 선생의 지론 같았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구에 유학 와 대학을 다니면서 겪었던 가난과 어려움은 말로 다 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나는 나은 축에 속했다. 당시 대부분 농촌 학생들이 대학 갈 만한 재능과 실력은 있었지만 가난 때문에 곧장 직장으로 간 친구들은 평생 가슴에 한을 갖고 살았다. 공상 같은 이야기라고 핀잔 받을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우리사회에서도 무상교육이나 무상의료가 된다면 농촌에서 추수도 하기 전에 나락 논을 갈아엎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도 아등바등 악을 덜 쓰면서 좀 더 넉넉한 심성으로 주변에 관대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이게 너무 비현실적이라면 당장 농촌을 구할 수 있는 정책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우선 쌀값부터 좀 올려야하지 않을까? 서민을 위한다는 이명박 중도실용정부에서.
시인.경북외국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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