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9 낙동'백두를 가다](40)전통 도자기 본향, 문경

민요자기 '막사발' 고집…전시용 아닌 서민의 삶 가득 담겨

▲조선요의 김영식(앞쪽)씨가 망댕이가마에 도자기를 넣기 위해 포개고 있다. 문경은 우리나라 전통도자기의 본향으로 천년의 세월 동안 우리 것을 지켜내고 있다. 찻사발로 대표되는 문경도자기는 이제 일본 등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조선요의 김영식(앞쪽)씨가 망댕이가마에 도자기를 넣기 위해 포개고 있다. 문경은 우리나라 전통도자기의 본향으로 천년의 세월 동안 우리 것을 지켜내고 있다. 찻사발로 대표되는 문경도자기는 이제 일본 등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16세기 문경지역에서 출토된 사발과 술잔이다.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운 모양이 특징이다.
▲16세기 문경지역에서 출토된 사발과 술잔이다.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운 모양이 특징이다.
▲문경도자시전시관 입구 벽면에는 문경도자기의 모양과 굽 형태를 한곳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 문경도자기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문경도자시전시관 입구 벽면에는 문경도자기의 모양과 굽 형태를 한곳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 문경도자기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인간과 흙 그리고 불의 조화는?' 바로 도자기이다.

문경새재 초입에는 문경도자기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문경이 전통도자기의 본향임을 알리는 곳이다. 문경도자기의 역사와 제작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고, 문경에서 출토된 자기류와 지역 도예인들의 혼이 깃든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문경도자기전시관은 대개의 도자기전시관과는 전시된 작품이 사뭇 다르다. 고려청자나 청화백자 등 최고급 도자기 주병 몇 점은 있을법한데, 그렇지 않다. 전시된 작품 거의가 그릇류이다. 요즘은 '찻사발'로 품격있게 칭하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막사발'로 불리던 것들이다. 이런 문경이 전통도자기의 본향으로 '뜨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서민들이 사용한 생활도자기를 만들어 왔고, 지금도 전통방식만을 고집해 도자기를 굽고 있기 때문이다. 이 뿐이랴. 일본인들이 마치 '신주 모시듯'하는 이도다완(井戶茶碗'조선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찻사발)이 가장 '이도'다운 곳이 문경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가장 한국적인 찻사발을 만드는 가마터, 문경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이유이다.

일본인들 찻사발로 가치 발견

고급도자기는 부유한 사람들이 부를 뽐내는 전시수단이었다. 값이 비싸서 깨질까봐, 흠이 생길까봐 사용치 못한다. 어쩌면 이것은 이미 도자기가 아니다. 하지만 별다른 이름도 가지지 않은 채 사용한 막사발은 서민의 삶 전반이 녹아든 것이다. 그 막사발이 오늘날 아름다움을 재생산해 찻사발로 다시 태어난 것. 그것들은 진열장 안의 골동품이 아닌 생활의 여유를 담는 그릇으로 당당히 쓰이고 있다. 그런 이유들로 문경도자기는 우리 조상들의 삶의 질곡이 서려 있으면서도 진정한 의미의 '명품'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경도자기는 서민들 전용의 그릇을 빚어내던 민요(民窯)에서 생산된 막사발이다. 술을 담으면 술그릇, 밥을 담으면 밥그릇, 이가 빠져 못쓰게 되면 개밥그릇으로도 사용했다. 가격 또한 정해지지 않았다. 도자기를 굽는 날 보부상들이 와서 엽전 몇 닢에, 또는 몇 말 곡식과 바꿔졌다. 말 그대로 문경도자기는 '막' 사용되며 가격 또한 '막(갑자기)' 매겨진 그릇이기도 했다. 얼마나 꾸밈이 없고, 투박하고 순수한가.

문경도자기가 주목받게 된 것은 사실 일본인에 의해서다. 1970년대 초반 일본에서 차 문화가 일반에 보편화되고 일본인들이 막사발을 최고급 다완으로 주목하면서부터. 말차를 주로 마시는 일본인들은 주둥이가 넓은 문경의 막사발을 경이로워했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이후 차 문화가 정착되면서 문경의 막사발이 찻사발로 새롭게 태어났다. 문경도자기는 더 이상 그릇시장의 찬밥신세가 아닌,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예술성 높은 찻사발, 명품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문경도자기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막사발은 사실 '도자기전쟁'이라고도 불렸던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부터 꾸준히 주목받아 왔다. 막사발을 너무나 당연하게 써왔던 우리들과 달리 나무를 깎아 그릇으로 사용했던 일본인들에게 당시 막사발은 하이테크산업이면서도 그들에게는 '문화 충격'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으로부터 전래된 찻사발(막사발)을 다완으로 총칭하고, 형태와 종류에 따라 분류해 작품마다 그 가치를 부여했다. 국보로 지정된 이도다완은 바로 조선의 막사발이다. 그 이도의 정신, 막사발의 정신을 구현한 문경의 찻사발이, 일본으로부터 가장 한국적이자 막사발로 존경받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문경도자기전시관 옆 마당에는 백자공방을 재현한 시설이 있다. 16세기 말 건립된 문경읍 용연리의 백자공방을 옮긴 것이다. 발굴 당시 직사각형 형태였고, 도자기 제작에 필요한 흙을 가져와 곱게 거르는 수비공 2곳, 도자기를 건조시키는 아궁이와 평편한 온돌시설, 황백색의 백자토 원석과 백자 여러 점이 출토됐다.

문경도자기 역사는 천년이다. 문경 동로면에 11세기의 고려청자 가마터를 시작으로 고려청자 가마터 4곳, 15세기 분청사기 가마터 1곳, 16~20세기의 백자 가마터 77곳 등 82개소의 가마터가 지금까지 확인, 발굴되고 있다. 추정 가마터까지 합하면 무려 200여개소. 청자에서부터 백자까지 천년의 세월 동안 굽고 또 구웠으리라.

문경도자기의 첫 출발은 타 지역의 도자기역사와 마찬가지로 관요(官窯)부터다. 고려와 조선중기 때까지만 해도 도자기는 주로 관요에서 만들었고, 왕실과 관청, 사대부가의 차지였다. 관요에서 생산된 사기 중 납품을 끝낸 후 남은 도자기나 서민들을 위해 별도의 도자기를 제작해 공급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그 수는 극히 미미했을 터. 지금의 경제논리로 치면 도자기는 '가진 자'들의 우선 차지에다 공급 부족으로 인해 모든 서민들이 공유할 수 없는 귀한 대접을 받은 셈이다.

도자기가 서민들에게 좀 더 다가간 시기는 1800년대 무렵. 문경이 민요의 요람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1886년 경기도 광주 분원 관요가 문을 닫은 뒤 문경지방 도공들과 관요의 도공들로부터 기술을 배운 문경인들에 의해 생활도자기가 생산되고, 대량 공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소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사발과 대접, 접시, 종지, 병, 제기 등 '문경의 것'은 보부상에 의해 1900년대 초 대구 서문시장에서까지 판매될 정도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천년의 역사, 옛 가마터 200곳

문경에서 가장 한국적인 생활도자기가 지금까지 옛 그대로 내려오는 이유는 뭘까?

문경은 도자기 생산에 있어 천혜의 조건을 가졌다. 도자기의 원재료인 흙이 풍부했다. 상주-예천과 연결된 하나의 도토(陶土) 벨트를 형성하고 있었다. 연료도 흘러넘칠 만큼 있었다. 사기굴의 땔감으로 쓰이는 송목들이 지천에 널렸으니 말이다. 바로 문경이 백두대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도 중요했다. 산 높고 계곡이 깊으니 맑은 물이 사철 흘러내렸다. 문경은 도자기의 유통에도 최적지였다. 문경이 첩첩산중이라 유통 조건이 매우 불리했을 것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면 오산. 문경은 영남대로의 중심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문경읍 관음리의 하늘재 너머에는 남한강의 황강나루와 하진나루가 있다. 뱃길로 한양이 코앞이다. 문경 산북과 산양을 거쳐 금천을 따라 가면 지금의 예천 삼강나루에 다다른다. 역시 내성천과 낙동강이 합수하는 곳으로 전국 어디든 물류망이 뚫려 있었다.

또한 문경이 가장 한국적인 민요의 요람으로 거듭난 데는 오지 덕을 톡톡히 봤다.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의 사기가 우리나라의 밥상문화를 점령한 시기에 문경만은 '왜사기' 침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다 문경은 지금도 '망댕이가마'라는 전통가마를 고집하고 있다. 문경읍 관읍리에 소재한 전통가마는 1843년에 설치된 현존 우리나라 최초의 가마이다. 가마의 소유자는 조선요의 김영식씨. 김씨는 8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망댕이가마는 우리나라 특유의 칸 가마로, 20~25㎝의 굵기의 사람 장딴지 모양과 비슷한 진흙덩이(망댕이)와 흙벽돌을 사용해 만든 가마이다. 망댕이는 가마의 윗부분이 반구형이 되도록 이어 짜 올리는데 사용하며 흙벽돌은 가마벽과 살창다리, 부뚜막을 만드는데 사용한다. 외형은 15도 경사에 규모가 큰 대여섯개의 칸으로 구성된다. 땔감은 과거 가마 근처에서 벌목해 사용했으나 지금은 목재를 사거나 제재소에서 쓰다 남은 피죽을 구입해 쓰고 있다.

도예명장 7명 중 3명 활동

문경은 한국도자기 역사를 관통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천년의 문경도자기 역사는 현재 중요 무형문화재와 명장을 낳았고, 대를 이어온 사기장들이 문경도자기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문경은 현재 국내 도예분야에서 유일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를 배출했고, 국내 7명뿐인 도예명장 중 3명이 문경에서 전통도자기의 본향을 알리고 있다.

문경읍 진안리의 영남요 백산 김정옥 선생은 국내 유일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이다. 원래 사기장이란 예전에는 국가기관인 사옹원에 소속돼 사기를 만드는 장인을 이르는 말이다. 김 선생은 7대조 때부터 200여년에 걸쳐 사기장 가계를 이어온 집안의 후손이다. 18세부터 부친 김교수에게서 사기 제작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김 선생은 현재 문경과 상주'영천, 전남 영광, 충남 부여, 경기도 안양 등지에 제자를 두고 있고, 아들 김경식씨도 대를 잇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통가마 소유자인 김영식씨는 김교수의 장손이다. 조선요라는 이름으로 문경 관음리에서 가업을 잇고 있고, 최근에는 동생인 김윤식씨(남양요)가 관음리에서 첫 가마에 불을 지피면서 형제 도예인의 길을 나섰다.

문경요의 도천 천한봉 선생은 1995년 대한민국 도예명장으로 선정됐고,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그 명성이 대단하다. 일본인들을 매료시킨 문경의 찻사발, 그 산파 역할을 그가 했다. 천 선생은 일본의 한 스님이 조선시대의 사발을 주문한 것을 인연으로 찻사발 등 각종 차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일본 전 지역에서 120여회의 도자기 전시회를 열었고, 국내 전시회만도 80회를 넘는다. 특히 2002년에는 일본 왕실에서 사용할 도자기를 주문받기도 했다.

문경은 찻사발이라는 명품을 가진 고장이다. 고려청자만이 자랑스러운 우리의 도자기가 아니다. 이제부터 자랑스러우면서 가장 한국적인 도자기 목록에 민요자기를 넣어야 할 것이고, 그 목록의 첫 머리는 문경의 찻사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종규기자 jongku@msnet.co.kr

문경'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자문단: 안태현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정옥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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