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국, 그리고 나] 캐나다 친구 '산드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소통할 뿐…

짐바브웨의 빅토리아폴스타운에서 국경을 넘어 잠비아의 리빙스톤으로 가는 길에 그녀를 만났다. 캐나다 여자 산드라. 그녀의 첫인상은 너무 특별해서 잊을 수가 없다.

늘씬한 배를 드러내는 골반치마에 타이트한 민소매셔츠, 이국적인 목걸이와 귀걸이, 아무렇게나 올려 묶었지만 나른한 여유의 멋이 풍기는 헤어스타일과 쪼리 샌들…, 이런 것들이 전형적이고 낭만적인 외국인 여성 여행자의 모습이다. 거기에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느릿느릿 걷는다. 여행을 처음 시작하던 시절 나는 그런 그녀들을 몹시 숭배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여행하는 여자'에 대한 그런 로망 때문에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여행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키와 몸무게가 받쳐주지 않는 나는 결국 흉내도 못 냈다. 헐렁한 면바지와 헐렁한 티셔츠, 헝클어진 짧은 머리, 게다가 눈이 나빠 뿔테안경까지 쓰고(안경이야말로 스타일을 구기는 최악의 아이템이다. 외국 여자들은 콘택트렌즈를 쓰는 한이 있어도 웬만해선 안경을 쓰지 않는다) 배낭 무게에 눌린 구부정한 어깨로 헥헥거리며 걷는다.

그렇다면 캐나다 여자 산드라의 스타일은 어떠했냐고? 바로 '나' 같았다. 몸뻬(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정말로 우리 외할머니가 입으셨던 딱 그 몸뻬였다)에 늘어진 티셔츠, 멋들어지게 가 아닌 정말로 '아무렇게나' 묶은 반묶음머리, 캠핑용 샌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허리에 찬 열쇠꾸러미였다.

여행자에게는 열쇠가 많다. 배낭 채우는 열쇠만 해도 두세개, 배낭을 어디다 묶어두는 체인 열쇠, 숙소의 사물함 열쇠 등등 그 많은 열쇠들로 짐을 풀고 싸는 일이 너무 귀찮아 때때로 '에잇! 여행을 집어치워야지!' 하고 외칠 때가 있다. 정말이다. 하지만 보디가드 한 명 없이 혈혈단신으로 여행하는 여자에게 자물쇠와 열쇠는 나를 지키는 전부이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내 몸과 배낭 하나뿐이고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로만 무장되어 있기에 하나라도 잃으면 생존을 위협받는 것이다. 아, 물론 배낭을 풀고 쌀 때마다 느낀다.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게 참 많지 않구나, 사실 요것들마저 없어도 살 수는 있겠구나, 누울 자리 있고 먹을 것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여행이 부처의 고행이 아닌 이상 '여행도 생활'이다. 생활필수품이란 게 필요한 거다.

배낭 하나로 유지하는 '초간단 생활인' 주제에 패션이나 품위 따위 신경 쓴다는 게 우습지만 그래도 나는 열쇠꾸러미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 짓은 못 한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에 비해선 내숭파다.

몸뻬에 열쇠꾸러미를 찬 서른두살의 캐나다 여자. 하지만 그녀의 특별함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녀는 영어에 서툰 나와 두 시간 이상이나(아니, 하루 종일이라도) 흥미진진하게 대화할 수 있는 놀라운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소유자였다. 나는 늘 입이 근질근질했으므로(생각해 보시라! 몇 개월을 대화상대 없이 홀로 여행해온 거다!) 사람만 만나면 아는 영어 모르는 영어 총동원해서라도 수다 떨기에 도전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영어권 사람들은 대체로 나와 30분 이상 이야기하면 피곤해 했다.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이랑 한국어로 장시간 대화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 사람의 발음을 알아듣기 위해 얼마나 귀를 쫑긋 세워야 하며, 같은 이야기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를 들여야 하는지를.

놀랍게도 산드라는 그런 수고를 별로 피곤해하지도 않았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말들을 내 표정과 몸짓만으로 알아들었다. 신기하게도 나 역시 그녀의 영어는 훨씬 쉽게 들었다. 우리는 아프리카와 캐나다, 한국을 넘나들며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어댔다. 캐나다에서 소아암병원에서 호스피스로 일했던 산드라는 아프리카에서도 여행지마다 간호사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보살폈던 아이들의 사진을 소중히 갖고 다녔다. 우리는 아침이면 시장에 나가 1.5ℓ 생수 몇 통을 사들고 와서 마치 호프집에서 사이좋게 캔 맥주를 마시듯 밤늦도록 생수병을 비우며 이야기했고 급속히 가까워졌다. 나는 산드라가 너무 좋아서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남은 3개월을 그녀와 함께 여행하고 싶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녀는 자원봉사활동을 위해 그곳에 남고 나는 떠났다.

여행을 하면서 '관계'(relationship)란 소유가 아니라 소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계를 가진다'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소통한다'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친구가 되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곧 그곳을 떠나 각자의 길을 가야한다. 이제 우린 친구이니까 이메일도 쓰고 몇 년 후엔 캐나다나 한국에서, 혹은 또 다른 여행지에서 꼭 만나자 따위의 약속은 의미가 없다.(그러니까 우리는 서로를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연인처럼 서로를 깊이 이해했고 좋아했으며 헤어질 땐 깊게 포옹(이거야말로 가장 가까운 소통이 아닌가. 마치 연인처럼)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그렇다. 그 장소, 그 시간,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 그저 소통할 뿐이다. 소유욕이 사라진 관계는 무겁지 않다. 그래서 떠날 때는 새털처럼 가볍게 떠날 수 있다. 그게 관계이고, 여행이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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