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고창 선운산

도솔천 따라 선홍빛 꽃무릇 군락 향연

선운산의 연간 탐방객은 40만명 내외. 국립공원 월출산이 25만 명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숫자다. 이 흥행의 배경에는 미당 서정주의 시 한편이 있다. 시든 동백의 안타까운 몸짓을 막걸릿집 여자에게 투영시켜 애틋한 감성을 자아내게 했던 '선운사 동구(洞口)'. 이 시의 애절한 시정(詩情)을 따라 관광객들은 선운사로 몰려든다.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동백은 봄꽃이고 관광객은 사계절 내내 몰려들기 때문이다. 이 틈새에 '꽃무릇'이 있다. 연둣빛 줄기에 선홍빛이 선명한 이 꽃은 선운사 주변과 도솔천을 따라 레드카펫을 펼쳐놓는다. 봄 동백의 시상(詩想)을 여름에 색(色)으로 펼쳐 놓는 꽃무릇의 향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용문굴 등 산자락 따라 불교 유적

'오르면 미륵세계, 내리면 선계(仙界).' 고창 선운산은 불교와 연관이 깊다. 산자락을 따라 도솔암, 용문굴, 마애불 등 유적들이 불교벨트를 이루고 있다. 지명도에 비해 높이는 낮은 편. 마니아들은 단순 높이(336m)만 보고 우습게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쯤엔 '이 산이 왜 호남의 명산반열에 올랐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한다.

가을바람에 실려 온 꽃무릇 화신(花信)을 접하고 취재팀은 산앙산악회 송삼목 대장의 안내로 선운산을 찾았다. 선운사 쪽에서 올라오는 인파를 피해 희여재를 들머리로 천마봉~도솔봉~선운사로 내려오는 역방향 코스를 선택했다. 지도를 받아드니 해발 300m급, 총 산행거리 10km 남짓. 일행 중 몇몇이 "산은 대충 타고 선운사 꽃무릇이나 실컷 보면 되겠네"라고 즉석 '견적'을 낸다. 다들 동의했다.

그러나 그 견적이 얼마나 안일한 셈법이었는지 바뀌는 데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맨 먼저 마주친 쥐바위봉. 이름 그대로 사람 대여섯 오를 미니봉 이련 했는데 도착해보니 수백 길 낭떠러지를 끼고 있는 제법 큰 규모의 암봉이었다. 당황한 취재팀이 '꽃놀이 모드'를 황급히 거두고 본격 '산행모드'로 바꾼 건 바로 앞 '배맨바위'를 보고 난 후. '돛단배 매 논 바위쯤' 으로 짐작했던 일행 앞에 나타난 건 유조선급 암봉이었다.

◆서해안 해넘이 풍경의 명소 낙조대

선운산은 곰소만을 사이에 두고 변산과 마주보고 있다. 올봄 만(灣) 들녘을 수놓았던 녹색물결이 지금은 벼들로 황금물결을 이루었다. 간척지 쌀 밥맛은 유명하다. 그 중 적절한 염도에서 자란 부안 쌀이 특히 인기가 있다고 한다.

취재팀은 어느새 낙조대에 이르렀다. 일찍이 '낙조대에 올라야 선운산을 논할 자격이 있다'고 할 정도로 이곳은 해넘이 풍경의 명소. 서해안엔 일몰과 관련된 명소들이 많다. 동해안에 일출과 관련된 장소가 많은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낙조대 바로 옆 천마봉은 선운산을 통틀어 최고의 조망을 자랑하는 곳. 아슬아슬한 북쪽 단애(斷崖)를 끼고 펼쳐지는 진흥굴 쪽 풍경은 단연 백미다. 바로 앞 천상봉 품에 깃들은 도솔암은 한눈에도 그곳이 길지(吉地)임을 알 수 있다. 낙조대에서 가파른 철계단을 따라 10여분 쯤 내려가면 용문굴이 나온다. 장방형의 긴 바위굴 안엔 백여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다. 근처에 진흥굴 등 불교성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들의 수도 장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용문굴 뒷산인 천상봉애서 개이빨산(犬齒山)에 이르는 구간은 이번 산행의 최고 난코스. 제법 가파른 경사길이 지겹게 이어져 대부분 등산객들은 이곳에서 녹초가 된다. 물론 험한 산길을 피해 우회하는 용문굴~도솔암~선운사 코스도 있다. 그럼에도 이 수고를 감수하는 까닭은 정상을 향한 집념 때문이다. 산꾼들에게 정상에서의 '인증샷'은 하나의 의전이다. 봉(峰), 령(嶺), 재를 넘어 겨우 정상인 도솔산에 도착했다. 흔한 표지석하나 없고 볼품도 없는 산이 주산(主山) 대접을 받는 것은 순전히 선운사를 끼고 있는 프리미엄 때문.

◆연두색 줄기에 빨간 꽃술'''요염한 자태

일행은 마이재를 넘어 석상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숲으로 우거진 길엔 나무들이 회랑(回廊)을 만들어 쾌적하고 시원하다. 숲 사이로 드디어 꽃무릇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두색 줄기에 빨간 꽃술은 홍사(紅絲)를 곱게 펴 놓은 듯 화려하다. 길 옆 녹차 밭에는 점점이 박힌 꽃무릇들이 아찔한 적록(赤綠) 대비를 이루었다. 이파리가 지고나면 꽃대가 올라오는 탓에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움만 키운다하여 '상사화(相思花)'라는 이름을 얻었다.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의 생태적 특징, 애틋한 전설, 매혹적인 자태 때문에 예부터 시인묵객들은 완상(玩賞)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굳이 이치를 따지자면 잎과 꽃은 동근생(同根生)이니 혈육간의 사랑이 더 가까운데 왜 남녀의 사랑을 접목했는지 궁금했다.

선운사 앞을 흐르는 도솔천엔 꽃무릇이 융단을 깔았다. 수면위에 반사된 진홍색 꽃물결은 이곳이 정말 승과 속을 가르는 경계처럼 느껴진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Tip]하산주는 풍천장어, 복분자술로

고창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명물이 풍천장어와 복분자다. 장어는 바닷물과 민물을 오가는 어류를 말하는데 상가에서 파는 장어는 대부분 양식. 1인분에 18,000원으로 다소 비싸다. 자연산 풍천장어는 kg당 20만원을 호가한다. 반주로 마시는 복분자술은 한병에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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