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폴라니(1866~1964)는 헝가리의 유대계 경제인류학자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의 문명(文名)은 서구에서 알려진 지 오래다. 다만 2차대전 이후 케인즈주의의 풍미, 70년대 이후 시카고 신자유주의의 위세에 가려진 탓에 일부 학자와 평자들의 논의 대상에 머물렀던 점이 아쉽다. 진보적 성향으로 인해 그는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하였으나, 최근 들어 그에 대한 관심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폭증하고 있다. 그의 통찰력과 혜안이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른바 애덤 스미스류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합리적 질서 내지 하이에크류의 자기조정적 시장 기능에 동의하지 않고, 시장경제란 시장만능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유토피아적 질서일 뿐이라고 갈파한다. 또한 그는 화폐, 토지, 노동 등을 다른 생산물과는 다른 허구적 재화라고 칭하면서, 이들 재화가 지나치게 그 힘을 발휘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위기를 촉발한다고 보았다.
그는 일찍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당시의 수도였던 빈에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글들을 썼지만 그의 가치가 발현된 것은 미국에서 '거대한 전환'(Great transformation)을 저술한 다음부터이다. 그는 마르크스나 케인즈처럼 시장경제의 비인간성, 비합리성 또는 무책임성을 지적하기보다는 시장경제 자체가 현실과 괴리된 망상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이른바 자기조정적 시장의 논리는 국가를 배제할 뿐더러 시장이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국가와 사회는 시장에 복속된다고 보았다. 이는 결국 인간의 자유와 이상, 희망을 파괴하고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고 간파하였다.
그는 이런 현상을 피하려면 마르크스식의 시장 부정도 아니요, 케인즈식의 국가 개입도 적절치 않으며 '사회'라는 실체를 제대로 살리는 것이 요체라고 생각했다. 즉 국가나 시장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의 역할에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시장 확장은 국가의 의도적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고, 국가 역시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생성된 것이어서 '사회'가 더 높은 차원의 제도라는 의미이다.
근년 들어 폴라니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마르크스처럼 극단적인 처방을 주장한 것도 아니고, 케인즈처럼 수정자본주의식의 개량적 방식을 내놓은 것도 아닌, 그러니까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인간이 주가 되는 사회를 지향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자유주의, 즉 시장만능주의가 배태한 문제점들이 적나라하게 노정된 오늘날 폴라니의 통찰력은 가히 시대를 뛰어넘는 탁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경우는 국가나 시장, 더 나아가 전반적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보다는 곡학아세적 궤변이 횡행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바, 폴라니와 같은 혜안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방적 주장보다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적 합의의 도출이라고 하겠다.
김한규 계명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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