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우리 구전신화 불러오기

대별왕, 소별왕, 오늘이, 문도령, 자청비, 황우양, 궁상이, 사만이, 강림도령, 자현장자, 원강아미, 할락궁이, 여산부인, 녹두생이, 은장아기, 놋장아기, 감은장아기…….

이 알쏭달쏭한 이름들의 임자는 누구일까? 모두 우리 구전신화에 나오는 신들이다. 특별히 우리 구전신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마 꽤나 낯설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제우스, 아폴론, 헤라클레스처럼 귀에 익은 이름이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다. 아니, 우리는 지금 우리 신화를 낯설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의 나라 신화는 친숙하게 여기면서 말이다.

그리스로마신화가 마치 신화의 대명사처럼 느껴질 만큼 우리 문화 속에 깊숙이 스며드는 동안, 우리는 단군신화와 고주몽신화 같은 몇 안 되는 문헌신화만이 우리 신화의 전부인 양 알고 지내 왔다. 그래서 가령 아이들이 우리에게는 재미있는 신화가 없느냐고 물어도 머뭇거리며 입맛만 다실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사실은 우리도 서양 못지않게 넉넉한 신화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우리 문화의 곳간을 채울 수많은 구전신화들은, 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까닭에 쉽게 잊혔으며 무속에 얽혔다 하여 '미신'이라 천대받고 음지로 숨어들었다.

우리 구전신화는 서양신화처럼 웅대한 서사로서 전해 왔다기보다는 백성들의 자잘한 삶 속에 파고들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왔다. 이를테면 물을 지키는 우리 신 용왕은, 그리스신화의 포세이돈처럼 거친 바다에서 다른 신들과 싸우며 모험 속에 몸을 던지지 않는다. 오로지 물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길흉화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신의 일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식구 중 누군가가 바다에 나갔을 때도,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 우물이 말랐을 때도 용왕에게 소원을 빌었다. 산을 지키는 산신령, 마을을 지키는 서낭신과 당산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들 신에 얽힌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바로 우리 구전신화이다.

사람 사는 집 안에도 신화는 있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집을 지키는 성주신과 집터를 지키는 지신은 부부 사이로, 일찍이 목수인 남편이 하늘나라에 불려가 궁궐을 짓는 동안 그 아내는 온갖 어려움과 유혹을 이겨내며 목숨과 절개를 지켰다. 남편 또한 놀라운 힘과 재주로 일을 마치고 돌아와 곤경에 빠진 아내를 구해냈다. 집과 집터를 지키는 신이 부부 사이라는 것과 성주신의 전직이 목수라고 하는 것은 놀라운 상상력이다. 이 두 신이 집의 기둥과 뿌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하면 마음까지 든든해지지 않은가.

또 이야기에 따르면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과 뒷간을 지키는 측신은 본디 본부인과 첩실 사이였다. 첩실이 간계를 써서 본부인을 죽이고 안방을 차지하지만, 막내아들이 그 죄를 밝혀내고 죽은 어머니도 다시 살려낸다는 것이 이야기 줄거리다. 옛날 목수들이 집을 지을 때 부엌과 뒷간을 마주보게 짓지 않았던 것이나, 아이들이 뒷간에 빠졌을 때 떡을 해서 고사를 지내며 심술궂은 측신을 달래던 풍속이 다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눈 밝은 막내아들은 대문을 지키는 신이 됐는데, 이로써 옛사람들은 집안에 들어오는 온갖 액을 막아주는 든든한 바람막이를 갖게 되었다.

그 밖에도 이야기는 많다. 어머니 아버지를 찾기 위해 기나긴 모험을 떠난 '오늘이'는 갖가지 어려움을 이겨낸 끝에 옥황궁 선녀가 되었고, 저승사자 대접을 잘 하여 나이 사만 살이나 먹도록 산 '사만이'는 사람의 수명을 다스리는 신이 되었다. 하늘나라 선비 '궁상이'와 땅 세상 처녀 '해당금'은 기구한 운명을 헤치고 금실 좋은 부부로 해로한 끝에 해와 달의 신이 되었고, 글동무 문도령과 자청비는 정수남과 더불어 굽이굽이 애틋한 사연을 만들며 사랑을 키우다가 모두 농사를 다스리는 신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 구전신화는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이다. 나라를 세운 영웅들의 거창한 이야기도 소중하지만, 일반 백성들의 삶에 깃들어 그들과 함께 호흡해 온 올망졸망한 이야기들도 얼마든지 되살릴 만한 값어치가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 구전신화를 되살려 전통문화의 불쏘시개로 만드는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의무로 돌아왔다. 이야기 가공과 보급이야 작가와 출판인 같은 전문인들의 몫이겠지만, 실제로 이야기를 즐기며 전승할 주체는 모든 시민들이다. 특히 아이들을 사랑하는 어른이라면, 우리 신화를 소재 삼아 멋진 이야기꾼이 되어봄직하지 않은가.

서정오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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