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터닝 포인트' 잡으면 인생도 잡힌다

농사짓다 면서기 괄시에 공무원 도전한 청년, 지금은 당당한 市長

"원, 투, 쓰리…차차차…턴, 턴…." 요즘 시중의 화두는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다. 영화로, 인터넷 게임으로 등장하는가 했더니 서점가에서도 터닝 포인트가 화제가 되고 있다. 5년 만에 안방극장에 복귀하는 탤런트 김태희는 "이번 작품이 나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으면 한다"고 드라마를 광고했다.

인생길 여정은 언제나 예정된 길을 따라 걸을 수만은 없다. 늘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며 걷는 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절곡(節曲)의 길'을 가야 할 때도 있다. 절곡의 길, 그 순간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다. 터닝 포인트를 어떻게 준비하고 맞느냐에 따라 비로소 삶이 방향이 크게 달라진다.

지역 오피니언 리더들의 터닝 포인트는 언제였고, 어떻게 찾아왔는지 귀동냥 한번 해보자.

황영목 대구고등법원장은 28세 나이에 임관, 외길 31년간 법복만 입었기에 인생 여정에 있어 두드러진 전환점이 없었던 편. 그러나 15년 전 45세 때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사무실에서만 근무하기 때문에 체력단련의 필요성을 느껴 주말 등산을 나선 것. 산길을 다니다가 만나는 야생화들 중 이름을 모르는 것이 워낙 많아 사진을 찍어 동정(同定·생물 분류학상 계통과 소속을 정하는 일)하기로 마음먹고 야생화 촬영을 시작했다. 지금은 주말이면 늘 카메라를 메고 산야를 누비는 두벌 인생을 살고 있는 셈. 머잖아 야생화 사진 개인전까지 준비하고 있을 정도로 관록이 쌓였다.

황 고법원장은 만일 내 생활의 터닝 포인트가 없었다면 주말마다 결혼식장 순회나 하며 무료한 주말을 보낼 텐데 지금은 주말마다 출사로 삶의 향기를 더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휘동 안동시장은 면(面)서기의 '괄시'에 자극을 받아 극적인 인생 전환점을 만든 케이스. 김 시장은 고교 졸업 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 호구책으로 고향에서 혼자 야산과 하천부지를 개간하던 시절이 있었다. 20대의 순진한 농촌 청년은 강을 낀 하천부지에 과수원을 일구고, 야산에는 목축을 하겠다는 꿈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당시는 개간을 허가하고 감독하던 면서기만 해도 위세가 대단했다.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던 면서기의 한마디에 농촌 청년의 꿈은 여지없이 꺾였다. 농사를 짓다가 군에 입대해서도 그는 면서기의 괄시를 계속 곱씹었다. 철원 최전방 OP에 근무하면서 영어·수학책을 놓지 않고 공무원 시험에 몰두했다. 그 결과 국가 행정직 공무원시험에 통과해 인생 일대 전환을 이뤄냈다.

김 시장은 "젊은 시절 손수 개간했던 하천부지는 금전적 가치는 미미하지만 아직도 개인 명의로 불하받아 소유하고 있다"면서 "지금도 그 땅에 서면 당시 고생했던 기억 때문에 가슴이 아린다"고 한다. "만일 삶의 터닝 포인트가 없었다면 지금은 안동시농민회장쯤 하지 않았겠느냐"고 기억을 되돌렸다.

군대 시절 인생 대전환을 이뤄낸 케이스 또 하나.

권준영 포항해양항만청장의 대학 초년 시절은 앞날에 대한 막연한 낙관, 유아독존적 사고로 불규칙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장래에 대한 설계나 비전도 없이 대학 2년을 마치고 끌려가듯 입대했다. 권 청장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군대라는 특수집단 속에서 비로소 사회조직에 대한 눈을 뜨고 앞날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 남을 돌아보는 눈을 갖게 되고, 또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군에서 배운 사회조직원으로서의 책임감과 강인한 정신력은 몇 차례 행정고시 낙방에도 굴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어떻게 보면 남들 다 가는 군대생활이 무슨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겠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군대라는 집단생활도 잘만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인생의 대전환을 이뤄낼 수 있다"며 군복무 시간을 허송세월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을 향해 일침을 가했다.

17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접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제2의 삶을 살아가는 대구과학대학 김석종 총장의 경우는 인생 대전환다운 터닝을 한 케이스다.

김 총장은 20세에 대구 북구청 공무원을 시작으로 공직에 몸담은 후 37세에 모든 지방공무원이 동경하는 중앙부처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즈음 대구과학대학 측지공학과가 개설되자 교수 채용에 응했다. 공무원연금 적용 3년을 앞두고 사직서를 몇 번이나 쓰고 찢은 끝에 결국 대학 쪽으로 길을 틀었다. "공무원 시절에는 내 일만 열중하면 됐어요. 하지만 교수가 된 이후에는 교육자로서 제자들에게 지식 전달과 취업 등의 책임감으로 한시도 마음 놓은 적이 없습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기에 자기계발의 기회가 되었다는 김 총장은 자신의 터닝 포인트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패션디자이너 최복호씨는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는 대학시절 내내 종교와 어긋지고 철학을 회의했다. 그러던 중 그의 예술적 재능을 눈여겨본 목사님의 권유로 패션 공부를 시작했다. 산고의 첫 출품작, '의처증 환자의 작품D'가 당시 패션계의 대모 최경자 이사장의 눈에 띄었고 그의 연구실 디자이너로 발탁되면서 인생 급선회를 하게 되었다.

최 디자이너는 "삶에서 대전환은 진로에 대한 번민 끝에 나타난 필연적인 전환이었다"면서 "터닝 포인트 이전과 이후의 삶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수단이 철학에서 패션으로 바뀐 것"이라며 "그것은 애벌레와 나방과 같은 변화"라고 술회했다.

정순천 대구시의원에게 찾아온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1994년. 대구에서 전국휠체어테니스대회를 개최한 시점이었다. 당시 대구테니스연합회에서 모집한 자원봉사자로 스포츠동호인들과 함께 참가, 볼보이부터 장애인 선수들의 훈련을 뒷바라지하면서 그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장애인단체뿐만 아니라 지역 합창단, 스포츠센터 관장 등의 직책을 맡아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시의회에 등원할 기회까지 주어졌다고 했다.

그는 "휠체어테니스대회 자원봉사자로 참가하지 않았다면 아무래도 평범한 주부로 가정을 꾸려나가지 않았을까 싶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면서 장애인과 노인복지에 초점을 맞춰 학술적 토대를 세우고자 노력한다"고 했다. 삶의 터닝 포인트 이후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를 발견한 셈이라는 게 그의 고백이다.

물리학도로 출발해 영남대 의대 방사선종양학교실에 몸담고 있으며 2년간에 걸쳐 '불교 100강 대특강'을 진행하고 있는 김성규 교수. 김 교수는 1974년 대학 입시에서 원하는 학과에 낙방하면서 한번 진로를 수정한 이후, 1985년부터 영남대의료원에 근무하면서 또 한번 인생의 대전환을 맞는다. 그는 물리학계 세계적 석학의 꿈을 접는 대신 평생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책을 통해 세상 사람들과 교감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해 한다. 김 교수는 "내 생의 중요한 두 고비는 생에 대해 더욱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0권의 책 출간과 2년 동안 불교강좌 대행군의 도약대가 되었다"고 말했다.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서양화가 장이규씨는 38세이던 1990년 어느날 우연 아닌 필연으로, 인생의 대전환 기회를 맞았다. 교편을 잡으면서 평소 작품활동을 함께해 온 '신미술회'의 그룹 소품전에 출품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의 작품을 눈여겨본 서울의 대형 화랑이 전속계약을 '콜'한 것. 이 전속을 계기로 교직을 접고 전업작가로 전향하면서 화업에서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제 삶의 터닝 포인트는 분명 그때이지만 갑자기 찾아온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늘 붓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다가온 기회로 봅니다. 아마 그 전환의 시기가 없었다면 아직도 교직에 있으면서 전업작가를 동경하고 있겠죠."

인생의 터닝 포인트.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군복무 시절, 또는 쉽지 않은 기간 동안 꾸준히 쌓아온 내공의 결실이다.

지금의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대전환의 시점을 잡고 지금부터 '내공 기르기'에 나서보라. '인생 대역전'의 행운은 없더라도 '인생 대전환'은 가능하지 않을까. '내일부터 내 인생 턴~턴이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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