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햄릿의 무대가 되었던 크론베르크성을 찾았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살았던 이곳에서 위대한 두 물리학자는 무엇을 느꼈을까?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에게 "햄릿이 이 성에 살았다고 상상하자마자 성이 달라져 보인다"고 말한다. 햄릿은 사실 13세기 역사에 몇 줄 등장하는 게 고작이고, 실제로 크론베르크에서 살았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아무튼, 셰익스피어는 크론베르크를 햄릿의 성으로 만들었다. 단지 거대한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은 이곳이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인간적 고뇌의 무대가 되었다.
이-푸 투안은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일화를 통해 장소와 공간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간은 추상적이지만 장소는 구체적이다. 지나는 곳이 공간이라면 머무는 곳은 장소이다. 미지의 공간은 익숙한 장소에 대립하고, 위협적 공간은 안전한 장소에 반대가 된다. 셰익스피어는 미지의 공간이었던 크론베르크를 햄릿의 장소로 만들었다. 우리에게 들어와 하나의 의미가 될 때, 공간은 장소가 된다.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일은 삶을 의미 있게 한다. 혹은 의미 있는 삶은 그가 사는 공간을 장소로 탈바꿈하게 한다. 내가 사는 곳이 장소가 될 때, 나는 그곳의 두려움을 극복한 것이며, 그곳의 삶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고, 그곳과의 삶을 결심한 것이다. 어쩌면 사람의 삶이란 끊임없이 그의 공간을 장소로 바꾸는 일, 즉 그의 주변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본능적으로 사람은 장소에 이끌린다. 물론 공간의 두려움은 호기심의 대상이며 매혹의 대상이다. 하지만, 장소의 편안함이 공간의 긴장에 우선한다. 공간은 탐험과 모색의 긴장으로 가득 차 있지만, 장소는 평화와 휴식으로 우리를 위로한다.
문화와 역사는 공간을 장소로 만든다. 문화와 역사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많은 도시가 문화와 역사를 통해, 장소가 되려고 애쓴다. 공간에는 아무도 멈춰서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필사적인 도시들의 경쟁은 단순한 자존심 싸움을 넘어서 생존의 문제로 비화되었다. 중앙에 집중된 자본과 권력이 지역을 고향 혹은 관광지로 내모는 탓이 가장 크다. 관광 자체가 하나의 산업이 되어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음이 두 번째 이유다. 지역마다 특징 없는 축제들이 난무하는 것은 이러한 싸움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표현이다. 공생을 도모하기엔 불안함이 지나치다.
우리들 또한 우리의 도시를 장소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전영권의 '대구지리', 대구거리문화연대의 '신택리지'나 천선영의 '일상문화공간'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 의미를 주는 작업이다. '대구지리'는 대구의 지세와 역사를 이야기하고, '신택리지'는 대구의 도시공간을 탐험하며, '일상문화공간'은 도시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산책과 휴식을 도모한다. 이러한 구거화 작업들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공간의 의미는 결국 구거를 통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리가 그만큼 매력적인 까닭은 한편으로 그곳에 대한 엄청난 구거들 때문이기도 하다.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19세기 파리에 등장한 아케이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논지는 19세기를 거치면서 소비하는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혹은 자본주의의 대중과 대중문화가 어떻게 그 기반을 닦았는지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는 그러한 논의를 위해 그러모은 자료들의 방대함과 촘촘함이다. 그리고 그 모든 자료는 파리의 도서관에 공식적인 기록으로 보관되어 있었다. 일상적 기록의 축적이 공간을 장소로 만든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주변 모든 것에 대한 기록이 우리의 역사가 되고, 우리의 문화를 만든다. 이제 우리의 주변을 기록하자.
대구가톨릭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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