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는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인이다. 그것도 독실한 믿음을 갖고 있는 신앙인이었다. 상당수 학자들은 안 의사의 의거는 천주교 신앙을 토대로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인으로서의 안중근은 아직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는 게 아쉬운 현실이다.
◆철두철미한 천주교인
안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맨먼저 한 일은 기도였다. 하얼빈에서 체포된 후 러시아 관리에게서 이토 사망소식을 듣자 그 자리에서 하느님에게 감사기도를 드리고 자신의 가슴에 십자성호를 그었다. 일본 검사가 신문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천주교에서도 죄악이 아닌가"라고 묻자, 안 의사는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라고 답했다.
안 의사는 철두철미한 천주교인이었다. 안 의사는 자신의 행동이 천주교 신앙 내지 교리 측면에서 정당한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죽음을 맞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순국 보름 전 두 아우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빌렘(한국명 홍석구·1860~1938) 신부에게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대한민국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1910년 3월 26일 순국 당일에도 뤼순(旅順)감옥에서 10분간 기도를 올리고 당당히 형장에 걸어 들어갔다.
안 의사가 영세를 받은 것은 19세 때인 1897년이었다. 아버지 안태훈의 권유에 따라 안 의사와 가족, 친척 등 36명이 영세를 받았다. 영세를 준 사람은 사형 전 성사를 준 빌렘 신부였다.
"경문을 강습도 받고 교리를 토론하기 여러 달을 지나 신덕(信德)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히 믿어 의심치 않고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며 날이 가고 달이 가는 몇해가 지났다. 그때 교회의 사무를 확장하고자 나는 신부와 함께 여러 고을을 다니며 사람들을 권면하고 전도하면서 군중들에게 연설했었다."(안응칠 역사)
안 의사는 뛰어난 전도사였다. 6, 7년간 황해도 일대를 돌며 전교활동을 했고 빌렘 신부의 복사(服事·사제의 미사 집전을 보조하는 평신도)로도 활동했다. 안 의사 일가는 1898년 자신들이 살던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 큰 규모의 성당을 세우고 빌렘 신부를 초청해 맡길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성장해 의병활동을 하고 이토를 처단하기까지 그의 삶의 지표에는 항상 신앙심이 깔려 있었다.
두 동생 정근, 공근이 1910년 2월 재판을 받고 있는 안중근을 면회왔다. 정근은 어머니 조 마리아의 말을 전했다. "앞으로 판결 선고가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고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거라."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이토 사살 후의 논란
안 의사의 의거 당시 조선교구장인 프랑스인 뮈텔(한국명 민덕효·1854~1933) 주교의 태도가 논란거리였다. 뮈텔 주교는 사형판결을 받은 안 의사의 요청에 따라 성사를 주러 가려는 빌렘 신부를 가로막았다. 뮈텔 주교는 안중근이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는 정치적 입장을 밝히지 않는 한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없다고 고집했다. 뮈텔 주교는 예전부터 안 의사와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빌렘 신부는 뤼순행을 강행했다. 빌렘 신부는 1910년 3월 8일부터 11일까지 안 의사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감옥에서 안 의사를 복사로 삼아 미사를 드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빌렘 신부에게 기다리는 것은 뮈텔 주교가 내린 2개월간 미사집전 금지 조치였다.
황종렬 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은 "뮈텔 주교의 개인적 입장이었을 뿐이지 한국천주교회의 공식 견해는 아니었다"며 "안 의사는 '의로운 전쟁'을 벌였으므로 살인자도 아니었고 성사를 받는 것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와의 불편한 관계를 타개하지 못해 1914년 프랑스로 돌아간다.
천주교회는 해방이 되고도 오랫동안 안 의사를 잊고 있었다. 50년간 한국천주교를 성장시킨 뮈텔 주교의 영향력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을 것이다. 안 의사가 천주교인으로서 '복권'(파문된 적은 없음)된 것은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이 추도 미사를 집전하면서부터다. 김 추기경은 강론에서 "일제치하 한국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우리 모두가 연대 책임을 느끼고 있다"며 "안 의사를 포함해 일제시대에 이 땅의 국민들이 자구책으로 한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로, 의거로 봐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후 천주교계에서 안 의사의 신앙을 본받으려는 분위기가 있지만 비체계적이고 산발적인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서상덕 가톨릭신문 취재팀장은 "올해 의거 100주년을 맞았는데도 일회성 행사가 대부분이고 신앙의 차원에서 심도 있게 다루려는 노력도 다소 부족한 것 같다"고 밝혔다.
윤선자 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안중근 의거에 대한 천주교회의 인식' 논문에서 "교회가 안 의사에 대한 연구결과를 신자들에게 알리고 교육시켜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며 "신자들의 삶안에서, 교회안에서 계속 활용되고 응용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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