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입니다.
팔공산 뒷자락 제2석굴암 가는 들길 가엔 빨갛게 물들어가는 사과들이 가을볕에 익어가고 있습니다. 햇살 바른 산중턱 위로는 단풍나무들이 붉고, 숲속엔 도토리나무 아래 꿀밤들이 후드득 떨어집니다. 가을은 어쩌면 다 익어서 마무리하며 정착하는 계절이 아니라 열매와 씨앗들이 드디어 먼 여행을 떠나는 계절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은 늘 서 있던 그 숲속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지만 열매와 꽃과 씨앗으로 멀리 떨어진 다른 세상과 소통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숲 연구가 N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식물은 일생에 또는 한 해에 단 한 번 열매로 맺힌 상태에서 이동하지만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누군가 상대의 눈에 띄어 도움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그것이 식물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입니다.' 사과나 감, 석류는 열매를 먹는 사람이나 다른 짐승들의 눈에 쉽게 잘 뜨이기 위해 색깔이 화려하고 큼직한 열매를 맺습니다. 저 혼자서는 열매 속 깊이 박혀있는 씨앗을 땅속에 떨어뜨리거나 심을 수가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눈에 쉽게 띄어 자신의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섭니다.
짐승이나 사람들이 먹을거리로 여기지 않는 열매나 씨앗을 맺는 식물들은 나름 다른 방식을 찾아냅니다. 단풍나무 열매는 사과나 감처럼 맛있지도 않고 향기가 뛰어나지도 않습니다. 아무도 일부러 따다가 멀리 이동시켜주고 씨앗을 퍼뜨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풍나무 열매는 자신만의 소통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을바람입니다. 바람에게는 단풍나무 열매의 향기나 빛깔이나 모양새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얼마나 가벼우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단풍나무는 스스로 열매를 최대한 가볍게 하고 열매 껍질의 구조도 헬리콥터 날개처럼 변형시켜 바람을 잘 타고 멀리 날아가게 한다고 식물학자들은 말합니다. 자신의 자식(씨앗 열매)을 멀리 보내기 위해 바람이라는 상대를 연구하고 적응하는 노력을 한 셈입니다. 반대로 도토리는 단풍나무 열매처럼 바람을 이용할 수가 없습니다. 도토리는 싫건 좋건 다람쥐나 사람 같은 움직이는 동물의 손길에 도움받는 소통을 시도해야 합니다. 껍질도 딱딱하게 해서 오랫동안 땅속에 묻어둬도 훌륭한 겨울 양식이 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다람쥐의 수요 조건에 맞추는 것입니다. 자신을 상대의 이익 조건에 맞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것이 주고받는 관계에서의 소통의 기본입니다.
앵두나무나 쥐똥나무 열매에게 소통과 협력의 대상은 바람이나 사람이 아닌 새들입니다. 식물 연구가들은 앵두나무나 쥐똥나무 열매는 숲의 색과는 보색(補色=반대색)이 되는 색깔로 익는다고 말합니다. 새들의 눈에 쉽게 띄기 위해섭니다. 앵두 열매가 빨간색으로 익는 것은 보색인 초록색 숲속에서 훨씬 더 잘 드러나기 위해서입니다. 쥐똥나무 열매는 검은색으로 익습니다. 노랑'주황으로 물든 가을 산에서는 흑색 열매가 더 돋보인다는 사실을 쥐똥나무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고 식물학자들은 감탄합니다. 자연 속에 숨겨놓은 신의 섭리요, 오묘함이겠지요.
이처럼 가을 나무들은 저마다 꽃과 열매와 씨앗을 피우고 맺으면서도 자신의 종족을 멀리 퍼뜨리고 이동시켜야 하는 소통의 목표를 위해서는 스스로 색깔과 향기와 모양을 소통의 상대에게 맞추는 부단한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누구를 이용해 먹겠다는 목적만으로 머리 굴리는 게 아닌 것입니다. 상대가 나를 도와주게 하려면 나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고 닦은 뒤에 상대 앞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대가 바람일 때는 먼저 나의 씨앗 껍질부터 가볍게 만들고, 상대가 다람쥐일 때는 내 열매의 껍질을 단단히 만들고, 상대가 새들일 때는 내 열매의 색깔을 어떤 색으로 맞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자세, 그것이 이 가을, 숲속 나무들이 가르쳐 주는 진정한 소통과 상생의 교훈이 아닐까요? 상대는 무가치하고 내 것만 소중하다는 자만과 독선, 이기적 정쟁(政爭)으로 때 묻어가는 이 시대에, 함께 되새겨 봐야할 가을나무 이야기였습니다.
金 廷 吉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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