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남교의 일본어 원류 산책-41] 설이 변한 말 오세치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명절하면 설과 추석이다. 설날은 1월 1일이고 추석은 8월 15일로 같지만 일본은 양력이고 한국은 음력이니까 실제는 한 달 이상 차이가 난다. 일본도 옛날에는 음력이었는데 명치유신 때 모든 것을 태양력으로 바꾸면서 명절도 이에 맞추느라고 바꿨다고 한다. 우리도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0월 유신 때 명절을 양력으로 바꿨으나 고대로부터 내려온 민족의 습관이라 잘 바꿔지지 않아 1990년에 다시 원위치로 환원하고 말았다. 사실 설이나 추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조상에게 제사지내고 성묘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국가라 해도 함부로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은 먼 고대로부터 내려온 조상에 대한 감사와 새로운 한 해를 기원하는 제삿날로써, 일본은 이날에 '오세치(節)'요리라는 것을 먹는다. 그런데 일본의 오세치는 한국의 '설'이 변해서 된 말로, '오'는 접두어이고 '세치'는'설'이다.

설에는 우리가 떡국을 먹듯이 일본도 '오죠니(お雜煮)'라는 떡국 비슷한 것을 먹는데, 이를 '오세치요리' 즉 '설요리'라고 한다. 그런데 오세치 요리는 전날에 미리 준비해서 그렇겠지만, 하나같이 차가운 것들뿐이다. 그러니 설날 일본인집에 초대받으면 모든 음식이 차서 뱃속까지 떨어야 하니까, 단단한 월동장비가 필요하다.

어렸을 때는 설날하면 새옷, 새신, 세뱃돈을 받는 재미가 있어서 설날이 오기를'하루하루'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이 '하루하루'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하루바루(はるばる)'로 '아주 멀리'라는 뜻이 된다.

명절은 있는 사람에게는 즐거운 날이지만, 없는 사람에게는 반대로 걱정거리로써 특히, 연말에 도둑이 많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도둑놈'을 남의 집을 턴다고 해서 고대에는 '털다보'에서 '털보'였던 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연음화하여 '도로보'(どろぼう)가 된 것이다. 우리말에 잠이 많은 사람은 '잠보', 꾀가 많은 사람은 '꾀보', 잘 우는 사람은 '울보'라고 하고, 여기서 '~보'라는 말은 약간의 애칭이 들어있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말에서는 털보가 사라지고 훔친다는 도둑으로 바뀌었다.

'도로보'는 어쨌든 고대 한국어가 변화 도중에 정지한 채로 남아있는 '화석 한국어'라 할 수 있다. 오래전 어느 TV드라마에서 사용한 일본어가 유행하여 한국을 휩쓴 적이 있는데, 그 말은 '민나 도로보데스'(みんなどろぼうです)'로 '전부 도둑놈이다'라는 말이었다. 고대에 건너간 우리말 '털다보'가 바다에 나가 성장한 연어처럼 고국으로 되돌아 왔던 것인데, 많은 말 중에 하필이면 왜 '도로보'가 돌아왔을까?

경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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