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들판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만추지절입니다. 쌀쌀해진 날씨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도 바빠집니다. 가을걷이하는 농부마냥 뭔가를 거두고, 뭔가를 정리하려 부산합니다. 어릴 때부터 세뇌되어 온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 강박 관념이 스스로를 압박한 것입니다. 가을은 그저 가을일 뿐입니다. 농부가 아닌 다음에야 특별히 거두고 챙길 것이 없습니다. 땔감을 준비할 필요도 없고, 문풍지를 바를 일도 없습니다. 보일러의 온도를 조금 올리고 두꺼운 외투를 걸치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세상 좋아졌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겨울 걱정에 한여름을 보내는 개미만을 지향하는 우매함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개미는 개미대로, 베짱이는 베짱이대로 사는 방식이 있습니다. 한여름 내내 시원한 나무 그늘을 즐기다 가을을 맞는 베짱이도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오면 다시 봄 노래를 부릅니다. 한여름 내내 땡볕에서 겨울을 준비했던 개미도 새봄이 되면 또다시 겨울 준비에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것이 이치(理致)입니다. 경쟁이 극에 달한 사회, 개미의 삶과 베짱이의 삶 모두를 즐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 번쯤 고개를 들어 가을 하늘을 보십시오. 심호흡 한 번에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가슴에 담을 수 있습니다. 잠시만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한껏 수확할 수 있습니다. 한 박자 늦추고 돌아가는 여유가 필요한 시기, '외면이 아니라 돌아가는 처세술'을 설파한 장자의 이야기가 새삼스럽습니다. '산의 나무가 재목감이 되면 허리가 잘리고, 등잔불은 주변을 밝히려면 제 몸을 태워야 하고, 계수 열매는 먹을 만하면 가지까지 꺾이고, 옻나무는 쓸 만하면 껍질까지 벗겨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쓸모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무용지물의 좋은 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인호 교수의 『장자, 분방한 자연주의자의 우화』(천지인, 2009)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하겠습니다. 대목장(大木匠)이 제나라로 가는 길에 곡원이란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엽기적인 상수리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지역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거목이었다. 둘레가 수십 미터였고 어찌나 높이 자랐는지 산봉우리를 아래로 굽어보고 있었다. 수백 미터 높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지가 있는데 가지 하나만으로도 나룻배를 수십 척 건조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무를 구경하기 위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장터를 방불케 했지만 유독 대목장만은 상수리나무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 뒤를 따르던 제자 목수들이 상수리나무에 넋을 빼앗겼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는 대목장을 쫓아가 물었다. "저희가 도끼와 대패를 잡은 이후로 저렇게 엄청난 재목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스승께서는 어찌하여 본 척도 안 하시는지요?" 대목장이 일갈했다. "찍소리도 하지마라, 저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야. 저런 나무로 배를 만들면 물에 띄우자마자 가라앉고, 관짝을 만들면 얼마 안 가서 썩어버리고, 그릇을 만들면 쉽게 부서지고, 문짝이라도 만들면 진액이 흘러나오고, 대들보를 만들면 좀이 잘 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니까. 쓸모가 없기에 오늘날 저렇게 엄청나게 자란 것이지.'
그날 저녁 대목장의 꿈에 상수리나무가 나타났습니다. 자신은 쓸모가 없었기에 오늘날 이렇게 거목이 되었지,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유용했더라면 진작에 허리가 잘렸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대목장을 꾸짖습니다. "당신은 당신 입장에서 쓸모가 있고 없고를 따졌지만 나에게는 당신이 생각하는 '쓸모없음'이 곧 생명과도 같은데 뭘 안다고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내리느냐."
이인호 교수는 이와 같은 장자의 이야기를 반어법의 일종이라고 설명합니다. 무능해야 별 탈 없이 오래 산다는 논리는 장자시대의 상황이겠지만 현대적 논리로 풀면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이용당할 능력이나 재주가 없다면 무난하다. 부득이하다면 그 능력이나 재주를 최대한 숨겨 이용당하지 말라. 설령 이용당하더라도 그로 인해 얻게 되는 명예와 부귀를 멀리하라."
경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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