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능력만 있다면…" 보수 대구氏, 딸에게 가업 승계

재벌가의 딸들은 여성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이미 기업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재벌가의 딸들은 여성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이미 기업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경영 수업은 적어도 최근까지 아들의 전유물이었다. 아들이 없다면 사위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런데 최근 딸들에게 가업을 잇게 하려는 기업인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아들딸 가리지 않고 능력만 된다면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생각에서다. 보수적인 대구에서 딸들의 경영 수업이 늘어나면서 세상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 딸도 잘해요

대구 팔공산온천관광호텔을 경영하는 이선기씨는 호텔 경영에 두 딸을 참여시키고 있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딸에게 사업을 물려줄 요량이다. 아직도 대구는 딸에게 가업을 잇게 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지만 이씨는 "아들이냐 딸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업을 잘 이해하고 사업을 잘 키우는 능력과 마음가짐이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지난해부터 딸들에게 호텔 출근을 명령했다.

이씨의 딸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커피숍 운영부터 배우고 있다. 여성의 섬세함과 꼼꼼함으로 이 회장이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까지 챙기고 있다. 이 회장은 이제는 여성들의 세상이라며 여성의 활동이 왕성해지는 것이 세상의 흐름이라면 딸들의 경영 수업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고 했다.

이씨의 딸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일을 돕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으나 아버지가 어떻게 호텔을 키웠는가를 보아온 터라 호텔을 잘 가꾸어보겠다는 생각으로 배우고 있다"고 했다.

바이오 기업인 한 업체도 현재 딸이 경영수업 중이다. 이 업체의 회장은 아들도 있지만 딸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 회장은 "딸이 생각 이상으로 판단력이 정확하고 대인 관계도 뛰어나기 때문에 경영에 참여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출근을 꺼리던 딸이 이제는 아버지를 도와 작은 일까지 구석까지 챙긴다. 특히 딸의 신선한 감각과 국제적인 시선으로 한마디씩 거들 때면 제법이라는 생각까지 든다"고 자랑한다.

문화 분야에서는 이미 딸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다. 송아당화랑 대표 박춘자씨는 지난해 딸에게 송아당화랑 서울점을 맡겼고 대구를 대표하는 모 화랑 역시 딸이 화랑을 이어갈 수 있도록 미국에서 공부를 시키고 있는 중이다.

# 이런 어려움도 있어요

국내 주식거래소와 코스닥에 상장한 1천656개 기업 2천211명의 CEO중 여성의 비율은 1%에도 못 미치는 15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여성 기업인의 숫자는 미미하다. 또 그들이 느끼는 사회적인 불이익은 많이 개선됐다고 하지만 가정과 일을 병행해야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은 여전히 많다. 중소기업청 조사에 의하면 여성 기업인이자 CEO의 86%는 여성의 기업 활동이 '남성과 비슷하거나 유리하다'고 느끼고 있는 반면, '불리하다'고 인식하는 여성 경영인은 1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이 기업경영 활동에 있어 유리한 점은 92.7%가 '세심하고 꼼꼼한 특성을 살려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는 데 용이하다'고 했다. 불리한 점은 "가사 및 자녀 양육의 병행"(29.0%), "사회적 편견"(28.8%), "남성 중심의 접대 문화"(21.7%) 등이라고 답했다.

이처럼 딸들의 경영 수업에는 아무래도 결혼이라는 큰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기업을 딸들에게 물려주려는 이들이 가장 우려하는 점도 시집 식구들과 친정집과의 관계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 것에 대한 걱정이다. 이 점이 딸에게 사업을 물려주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살림과 일을 병행하는 데 따른 어려움과 시집 식구의 이해를 과연 받아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한 기업인은 "딸의 경영 수업은 딸의 결혼으로 인해 시집과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많은 문제들이 빚어질 가능성이 큰 것도 사실이다"고 했다.

#재벌가 딸들은 벌써 시작했어요

재벌가에도 딸들의 반란이 시작됐다. 김승호 보령제약그룹 회장의 큰딸인 김은선 보령제약그룹 부회장은 올해 1월 보령제약 회장으로 승진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큰딸인 조현아 대한항공 상무는 올 3월 칼호텔네트워크 대표와 4월 한진관광 등기이사 등재라는 두 마리 토끼를 거머쥐었다.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의 큰딸인 현정담 동양매직 상무보도 올해 승진했다.

또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의 큰딸인 박혜원 두산매거진 상무는 그룹 내 광고 및 각종 사업 마케팅을 총괄하고 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큰딸인 정성이 이노션 고문은 제주 해비치리조트 전무를 맡고 있다. 신영자 롯데쇼핑 부회장의 큰딸인 장선윤 롯데쇼핑 상무는 2005년 명품브랜드 에비뉴엘 개점을 진두지휘하며 명품 브랜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명희 신세계 그룹 회장의 큰딸인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는 명품 숍 국내 최초 도입, 조선호텔 수익 개선 등 경영 수완을 발휘하며 입지를 굳히고 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둘째 딸인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는 제일모직의 미래사업 발굴과 브랜드 중장기 전략기획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큰딸 이부진씨는 호텔신라 경영전략 담당 상무로 활동하고 있다. 또 이윤재 피죤회장의 장녀인 이주연씨는 피죤 부회장으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은 여성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자신의 능력을 키워가고 있고 대부분 해외 유학파들이다. 이 밖에도 뉴서울, 라마다, 임페리얼 팰리스 호텔(옛 아미가 호텔) 등 중견 호텔들도 오너의 딸들이 '경영 수업'에 나서고 있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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