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국은 나의 운명' 英 셰필드대 그레이슨 교수

"한달 봉사활동 왔다가 44년째 '질긴 인연' 이어 갑니다"

영국 셰필드대 제임스 그레이슨(65) 교수는 한국과 옴팡진 인연을 갖고 태어난 운명이었다.

1965년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그해 겨울 한국과 일본에 각각 1개월씩 봉사활동을 했는데 한국에서 찡한 '정(情)'을 느꼈고, 그 후로 한국과의 인연은 44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레이슨 교수는 한국인 두 아들까지 입양해 잘 키웠다. 첫째는 앤드류(24·한국명 김안대), 둘째는 크리스토퍼(22·김기정)다. 결혼 5, 6년차 때 부인도 흔쾌히 입양에 동의했고 두 아들 모두를 새 식구로 맞이하게 된 것.

그레이슨 교수와 대구·경북의 인연도 끈끈하다. 경북대에서 4년 동안 인류학, 계명대에서 4년간 신학을 가르쳤다. 이때 한국 이름도 지었다. 김정현(金正玄). 한국 생활을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가서는 22년 동안 영국 셰필드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쳤다.

그는 "이 모든 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뜻이고 한국과 나의 운명적 관계"라고 말했다. 12일 대구를 찾은 그를 계산성당에서 만나 2시간가량 한국과의 인연과 한국을 생각하는 마음을 들여다봤다.

◆영국에서 '한국학' 뿌리내려야

그레이슨 교수는 "영국에서도 한국학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한반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를 잡아야한다"고 역설했다. 이런 확고한 신념 때문에 그는 지난 5일부터 7일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해외 한국학, 현황과 전망'에서 셰필드대에 한국학 전공이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다며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당부했다.

영국에는 한국학을 부전공이 아닌 단독 전공으로 운영하는 대학이 런던대 아시아·아프리카학과와 셰필드대 동아시아학과 2곳 밖에 없다. 그런데 셰필드대에서 전공과목 유지가 힘든 형편이 된 것.

그 이유는 22년 동안 한국학을 가르쳤던 그레이슨 교수가 지난달 정년퇴임 하면서 셰필드대에는 한국학 전공교수는 체리 주디스(Cherry Judith) 교수 1명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 이래서는 전공을 유지하기 힘들다. 최소 2명은 있어야 전공을 유지할 수 있다. 한때는 한국학 전공 교수가 그를 포함해 3명이나 됐는데 지난해 1명이 줄고 올해 그가 퇴임함에 따라 이제 그야말로 초라한 신세가 됐다.

이 때문에 그가 한국을 찾아와 영국 셰필드대 한국학과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한국학을 배우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1학기에 35명, 한국 관련 학문을 공부하는 학생은 270~300명이나 되기 때문에 한국학은 반드시 전공과목으로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또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한국학도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고 있지만 중국학과 일본학에 비하면 그 지원자가 절대적으로 적다"고 지적했다.

그레이슨 교수는 "학생 1명을 가르치는데 연 평균 9천파운드(우리 돈 약 1천700만원)가 드는데 학교에서 내려오는 예산은 3천파운드밖에 되지 않으니 한국 정부에서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이번에 문제가 된 한국학 교수 충원문제가 한국에서 일정 부분 지원을 하고 셰필드대에서 어느 정도 부담을 하는 방식으로 잘 해결되기를 바랐다.

◆난 한국 전도사이자 교수·목회자

그레이슨 교수는 한국 전도사다. 44년간 한국과의 인연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을 뿐 아니라 아마도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국을 찾고 또 다른 일을 계획하고 싶어했다.

1965년 겨울 경남 창원 진동면 광암리 어촌에서의 봉사활동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한국과의 첫 인연이자 평생 인연의 첫 단추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한 달간 봉사활동을 했는데 아무 감흥이 없다 한국에선 마지막 환송 때 짠한 감동을 느끼고 또 오고 싶은 맘을 갖게 된 것.

이후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에서 인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때만 해도 그는 인류학 교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다시 한국으로 인도했다. 듀크대에서 신학석사를 공부할 때 한국에서 온 나원용 목사와 룸메이트가 됐으며 나 목사로 인해 한국에 전도사로 가기로 결심했다.

1971년 6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한국에서 전도활동과 함께 대학에서 인류학과 종교학을 강의했다. 이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에딘버러대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목사자격까지 얻은 그는 교회 목회자이자 교수이자 한국전도사가 된 것이다.

그레이슨 교수는 박사논문 '종교의 접목, 한국 교회에 관한 연구'(The implantation of religion, a study of the korean church)도 한국과 깊은 관련이 있는 주제였다. 한국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게 됐는지 이유를 밝힌 연구였다.

그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한국은 유교적 방식인 효(孝) 사상이 있어 부모의 기일을 추모하려는 의식이 강한데 이를 추모예배 형식으로 바꿔준 것도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구에는 그의 사랑하는 제자도 있다. 조원경(52) 하양감리교회 목사. 그레이슨 교수는 계명대에서 신학을 강의하던 시절 대학원생이었던 조씨를 자비로 영국 유학을 보내, 신학과 철학박사를 받는데 큰 도움을 줘 아직까지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것.

15년여 만에 계산성당 인근을 다시 방문했다는 그는 "대구 도심도 많이 변한 것 같다"며 "빌딩이 숲을 이룬 도시보다는 이렇게 언덕 위에 100년 가까이 된 큰 교회(제일교회)와 고딕양식의 100년 넘은 성당이 조화를 이루며 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소회를 밝혔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 그레이슨 교수의 인생스토리

제임스 그레이슨은 1944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올해 우리 나이로 66세다. 그의 부모님은 영국인.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사람이다.

그레이슨은 초·중·고교를 뉴저지에서 다녔으며 루거스(Rutgers) 대학에서 사회인류학을 전공했다. 컬럼비아대에서 인류학으로 석사를 받을 때만 해도 인류학자의 길을 걷는 듯했으나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듀크대에서 조직신학 석사까지 마쳤다.

이후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과감하게 한국과의 인연을 선택했다. 한국에서 감리교 선교활동과 함께 한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한국을 제대로 배우는 길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물론 1965년 겨울 경남 창원에서의 따뜻한 정을 잊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이후 그는 양가 부모님이 중매에 나서는 바람에 현재 아내인 독일계 영국인인 힐드브란트 룻과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함께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인 두 아이도 입양했다. 생후 4개월밖에 안 된 아이들을 데리고 와 모두 훌륭하게 성장시켜 놓았다. 첫째는 한국에 대해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지난 월드컵 이후 한국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으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도 느끼고 있다고 했다. 둘째 아이는 기특하게도 어릴 적부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 특히 대구·경북지역 대학에서 인류학과 종교학을 강의하다 또다시 그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한국과의 인연은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었다. 그는 1987년 영국 셰필드대에서 한국학 교수 채용공고를 보고, 한국을 영국에서 가르치는 것도 더 보람된 일이라 여겨 지원했다. 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낙점된 것이다.

이후 그는 영국 셰필드대학 한국학 교수로 22년간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셰필드대를 영국 내에서 런던대와 함께 한국학을 전공으로 가르칠 수 있는 2개 대학 중 하나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정년퇴임한 지금도 그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이어지고 있다. 혹시 영국 내에서 한국학 강의가 위축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레이슨 교수를 감히 말하면 미국에서 태어난 영국계 한국인이었다.

권성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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