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세계 그림책 출판계에 획기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세계 최초로 흑인 아이가 등장하는 그림책이 나온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의 혁명가'로 불리는 에즈러 잭 키츠(1916~1983)의 작품 '눈 오는 날'(1962년)이 그것이다. 눈을 보며 마냥 즐거워하는 아이의 모습을 담은 작품은 출간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세계 어린이 독자와 엄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뉴욕 브룩클린의 빈민가, 폴란드계 유태인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작품에는 항상 흑인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는 쓰레기더미를 놀이터 삼아 놀았던 어릴 적의 가난과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며 보낸 경험이 유색 인종에 대한 동병상련을 불러일으킨 결과이다.
꽤 오래전부터 적어도 그림책 세상에서는 인종과 문화에 대한 편견이 없어졌다. 미국, 유럽뿐만 아니라 대만, 일본, 중국, 이집트, 아프리카, 베트남, 티베트가 배경이 되며 그 나라 어린이들이 등장한다. 한국 출판계도 마찬가지여서 최근 세계 문화와 다문화를 주제로 한 그림책을 부지런히 만들어 내고 있다. 그 책들을 보면 다문화가정의 비참한 현실을 비추는 우울한 내용도 있지만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들도 많다.
필자가 지난 2년 동안 결혼 이민 여성과 자녀들에게 그림책으로 다가간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들의 심리를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강한 성장 메시지와 교훈을 담은 그림책은 피부색과 용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한국말이 서툴다는 이유로 소외되고 상처입은 다문화가정 자녀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침묵의 상담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교육이 끝나면 책을 선물로 주곤 하는데 그 어떤 것보다 받는 이들의 만족도가 높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문화 시대를 맞이하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다양한 다문화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그 정책이 획일적이고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씁쓸하다. 적지 않은 결혼이민 여성들과 자녀, 가족,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관계자, 지자체 공무원들을 접하면서 다문화 정책의 허와 실을 보았고 때로는 분노를 느꼈다. 정부는 다문화 정책에 엄청난 예산을 집행하고 있지만 과연 그 돈이 실효성 있게 쓰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다문화 복지 정책만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한 곳도 없을 것이다. 다문화 관련 정부 예산은 눈먼 돈이며 예산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능력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오가고 있으니. 정작 지원이 필요한 곳에는 예산 구경하기가 힘들다.
연구 논문에 쓴다며 툭하면 들이닥치는 설문 조사 요청도 다문화가정을 피곤하게 한다. 볼펜 한 자루 주면서 읽기 힘들고 눈도 아프게 만드는 장문의 설문 조사에 응해달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나라에 살러 왔어요. 우리는 실험 도구나 마루타가 아니예요"라고.
정부와 지차제의 다문화 정책이 예산을 마구잡이로 뿌려대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다문화가정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적 기대감을 많이 갖게 한 것도 다문화에 대한 몰이해가 빚어낸 시대의 자화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다문화 정책이 우왕좌왕하는 것은 가슴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기보다 예산 따내는 방편 또는 겉으로 보이는 성과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닐까. 다문화 교육은 먼저 우리 국민들을 대상으로 이뤄져야 한다. 다문화가정에 집중된 국가의 정책이 아무리 좋아도 국민의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모래 위의 성 쌓기일 뿐이다.
바야흐로 다문화 시대에 획일화보다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교류'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하는 시점에서 대구시가 2004년에 정한 도시 슬로건 '컬러풀 대구'는 시대의 흐름과 상통하는 작명이다. 이는 도시의 전반적인 색깔과 이미지만을 개선하자는 슬로건이 아니리라.
수십 년째 터를 잡고 정붙여 살아도 타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설움을 느끼는 곳이 대구라고 한다. '컬러풀 대구'는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며 지역적 순혈주의에 젖어있는 회색빛 도시에서 탈피해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사람들의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고 관용과 이해의 똘레랑스가 있는 열린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는 자기 성찰을 담았다고 본다. 슬로건처럼 대구 토박이든, 외지 사람이든, 다문화가정이든 모두가 내남없이 조화로울 수 있는 진정한 '컬러풀 도시' 대구를 꿈꿔 본다. 그림책 속 다문화 세상처럼.
김은아 마음문학치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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