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다/진회숙 지음/청아 출판사 펴냄

월북작가.친일파라지만…예술혼은 빛났다

이중섭 작
이중섭 작 '흰소'

혼란한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은 일제 식민 지배와 극심한 가난, 해방 후의 혼란, 분단과 한국전쟁 등 격랑을 헤치며 자신의 예술혼을 불살랐다. 때로는 외세의 압제에 굴복했고, 복종했다. 가난을 이기지 못해 예술을 상업적으로 팔아먹기도 했다. 한국전쟁 전후 남한이 아니라 북한을 택하기도 했다. 그런 자취들은 족쇄로 남아 그들의 예술 자체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월북 예술인, 친일파라는 꼬리표를 제거하면 그들에게 남는 것은 오롯한 예술혼과 열정이다.

조선 최후의 어용화사인 동양화가 김은호. 황국 신민의 영광을 안고 열과 성을 다해 작품 활동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일제가 대동아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경제 수탈을 벌일 때, 그는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창씨개명 등에 동조하며 군국주의에 영합했다. 쓰루야마라는 일본식 성으로 창씨개명도 했다. 일본 천황에게 화필보국과 회화봉공의 충성 맹세를 하며 친일 대열의 선두에 서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화단에 친일파 화가들을 대거 배출시켰다. 자신의 제자를 당선시키기 위해 고려청자를 일본인 심사 위원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인맥을 통한 파벌을 조성하고 일본풍의 채색화가 한국에 풍미할 수 있는 요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제에 협력했기에 해방 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미군정 당시 친일파 재기용 붐을 타고 다시 화단의 총수로 떠올랐다. 자신이 키운 친일파 제자들의 비호를 받으며 그는 대한미술협회와 국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민족의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김은호는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몸부림 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당대의 화가들과 달리 술, 담배를 하지 않았고, 방탕한 생활과 거리가 멀었다. 주일마다 착실하게 교회에 다녔다. 여기에 김은호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승승장구했던 데는 각별한 제자 사랑과 과묵하고 신중한 인품이 한몫했다는 후문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그와 인간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서양화에 한국의 예술혼을 담았던 화가 이중섭. 그는 부유하게 태어났으나 불행하게 살다가 불행하게 죽었다. 그는 천재적인 그림 솜씨와 불굴의 노력으로 일본 유학 시절 이미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실력 덕분에 조선인으로서 일본 제일의 재벌 미츠이 그룹의 계열사 일본창고 주식회사 사장의 외동딸 마사코와 결혼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천대했다. 게다가 마사코처럼 부유한 집안의 딸이 조선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흥미진진한 뉴스였다. 온갖 말들이 무성했고 이중섭은 그런 한계를 알았기에 청혼을 하거나 장래를 약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사코는 기어이 자신의 부모들을 설득했고 이중섭과 결혼해 조선으로 건너와 이름도 한국식으로 바꾸었다. 창씨개명으로 조선인들이 일본식 성씨를 따르던 시절, 일본여자가 '이남덕'이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개명한 것이다. 일본의 부잣집에서 자란 이남덕은 가난한 집으로 시집와 '몸빼바지'를 입고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꽁보리밥에 된장을 먹었다.

해방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이중섭은 아내와 헤어졌다. 아내를 일단 일본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뒤에 일본에서 잠시 아내를 만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다시 함께 살 수 없었다. 장모는 귀한 딸을 고생시키는 것도 모자라, 초라한 몰골로 나타난 이중섭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구 미국 공보원장으로 있던 맥타가트는 이중섭의 그림을 보고 한눈에 반해 전시회를 열어주고 격려했다. 전시회가 끝난 뒤 이중섭을 만난 맥타가트는 "그림 잘 봤습니다. 당신의 황소는 스페인의 투우처럼 무섭더군요"라고 했다.

이중섭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내 소는 싸우는 소가 아니라 일하고 고생하는 소…. 소 중에서도 한국의 소란 말이야."

이중섭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날 이중섭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일생을 바쳐 그린 소가 엉뚱하게 스페인 투우에 비유되는 것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었다. 그러나 대구 미국 공보원장 맥타가트는 귀국할 때 이중섭 그림 10여점을 사가지고 갔고, 이 중 은박지 그림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정신분열증과 간장염으로 고생하던 이중섭은 1956년 9월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병원 측은 그를 무연고자로 처리해 시신을 방치했다. 사흘 뒤 친구들이 찾아왔고 그의 유해는 화장돼 일부는 망우리에, 일부는 일본의 아내에게 보내졌다.

작곡가 안익태는 1906년 평양에서 여관업을 하는 집안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 동네 예배당에 있는 풍금을 처음 접한 이후 서양 음악에 빠졌다. 형이 사다준 바이올린을 켜고 아버지를 졸라 코르넷을 사서 불기도 했다. 그는 반드시 훌륭한 음악가가 되고 말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다짐하곤 했다.

일본 유학, 미국 유학, 유럽 유학 등 그는 음악을 배울 수 있다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나중에는 일본인 지휘자로 행세하기도 했다. 1942년 9월 18일, 이 날은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베를린에서는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연주회가 열렸고 안익태는 주최 측의 의뢰를 받고 기념 축하곡을 작곡하고 연주했다. 객석에는 만주국과 일본 황실 가족, 고위 관료, 나치 간부들이 앉아 있었다. 이 연주회의 영상은 지금도 남아 그날의 치욕적인 역사를 증언한다.

이 연주회를 계기로 안익태는 지휘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이후에 각종 연주회에 참가해 일본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휘했다. 해방 직전까지 안익태는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훗날 안익태는 자신의 친일 행위를 숨기려 애썼지만 결국 드러났다.

안익태의 친일 행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는 천재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를 잉태하고 낳았던 조국은 그가 음악적 천재성을 펼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음악으로 평생을 살고, 음악으로 성공하고 싶었던 안익태. 우리가 안익태에게 '음악이 아니라 조국을 택했어야 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각 분야 15인의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조명한다. 음악가 김순남, 안익태, 소프라노 김자경, 영화감독 나운규와 이만희, 건축가 김수근, 화가 이중섭과 이은호, 작가 김성환과 임선규, 윤석중, 사진과 임응식, 고미술품 수집가 전형필, 무용가 최승희까지…. 상상력을 조금만 보태면 '난세'를 살았던 예술가들의 인간적 고뇌와 예술적 업적을 두루 살펴볼 수 있겠다. 352쪽, 1만5천원.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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