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어김없다. 하늘은 더 높아 팽팽하고 사방은 알록달록하여 아름답다. 그런데 마음은 영 딴 판이다. 바람 부는 들판에 서서 속절없이 울어보고 싶고 덜컹거리는 기차를 타고 하염없이 떠나가고 싶다. 그런 계절이 가을이다.
이럴 땐 밥도 청소도 다 미루고 하루쯤 마음 가는 대로 나를 내버려 두자. 여행도 괜찮겠다. 남편과 함께여도 좋고 마음 맞는 친구와도 즐겁다. 떠날 량이면 한적한 국도를 택한다. 지금 시골길에는 가을을 사열하듯 코스모스가 피어있고 사과나무와 감나무는 풍성하여 가로수와 어울려 그림처럼 예쁘다. 결코 빠른 도로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김상희의 '코스모스'를 흥얼거리며, 조지 윈스턴의 '가을'을 들으며 떠나는 길은 설렌다. 행복감이 밀려오면 남편의 손을 슬며시 잡아보라. 되돌아오는 남편의 미소가 청년처럼 싱그럽다. 여행이 가져다주는 신선함이다. 황금 들판을 만나면 기어코 차를 세워 들길을 따라 걸어보라. 누런 들판과 푸른 하늘과 풀쩍 뛰는 메뚜기가 평화롭다. 가을 햇살로 폭신해진 남편의 등이 한없이 든든하고 고맙다.
친구와 함께라면 코스모스길에서 가던 길을 멈춘다. 머리에 꽃 한 송이를 꽂으며 깔깔대는 소녀가 되어보는 것도 정겹다. 웃는 것에도 지치면 예스런 찻집에 들러 진한 국화차 한잔으로 세월을 놓아보자. 햇살 사이로 선명해진 친구의 주름이 한결 다정해 보이고 깊어진 눈매는 고혹적일 것 같다. 나이 들면 어떠리. 늙어야 마음이 넉넉해지고 너그러워지는 것을.
내친김에 하루쯤 묵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저 혼자 나뭇잎이 떨어지는 가을밤, 술 한잔으로 그윽해지고 깊어질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 저혼자 바람이 뒹구는 가을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맑고 아름다운 시를 읽어 본다면 그것 또한 멋지겠다. 가슴에는 두껍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치고 시처럼 살고 싶다는 유혹이 일렁일 것만 같다. 친구와 함께라면 밤새 수다를 떨어도 나쁘지 않은 밤이다. 낭만이 뭐 별건가.
여기에 책 한권이면 무엇이 더 필요하랴. 수필이나 시집이 좋겠다. 투명하고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숲속에서, 혹은 바람 부는 길가 어느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자신을 상상해보라.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행복하고 눈빛은 살아난다. 결코 집에서 맛볼 수 없는 충만함이다.
이 가을, 나를 위해 멋진 선물 하나쯤 해 줄 수 있는 그런 계절이면 좋겠다.
sj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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