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정희, 그와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박정희 한국의 탄생/조우석 지음/살림 펴냄

대한민국은 언제 탄생했는가? 이승만 정권부터? 이 책 '박정희, 한국의 탄생'의 지은이 조우석은 '한국의 탄생은 박정희 시대부터'라고 말한다.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쿠데타 세력의 집권 이후인 1960년대, 70년대에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근간이 거의 완성됐다는 것이다. 특히 경제부문의 진보는 경이롭다. 영국이 131년, 일본이 72년 걸렸던 경제성장을 20년 만에 이룬 것이다. 1970년대 유신 이후 계획된 조선업, 반도체, 원자력 발전과 같은 중화학 공업은 이후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이 됐고 오늘날 한국이 경제강국으로 도약하는 기초가 됐다.

극단적인 찬양과 외면을 받고 있는 박정희.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와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박정희를 둘러싼 논란에 마침표를 찍자고 말한다.

"내가 어떻게 부정 따위에 손대지 않았는지 궁금할 것이다. 나는 구식 한국인이고 징고이스트(맹목적 애국주의자)여서 '부정탄다'는 말을 믿었다. 때문에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그것이 중화학 공업 프로그램이든 율곡사업이건 간에 내 자신이 부정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우선 준비했다. 뇌물을 받는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심지어 아내와 동침하는 것조차 피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청와대 경제 2수석을 지낸 오원철의 말이다.

그랬다. 새마을 노래의 한 구절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말처럼 당시 한국인은 가난의 굴레를 벗고 잘 살아보겠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열정의 시대에 국가의 경제정책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오원철은 감히 부정과 악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서독을 방문한 목적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발전상을 배우기 위한 것도 있지만, 돈을 빌리기 위해서입니다. 빌려만 주시면 그것을 국가 재건에 힘쓰겠습니다. 우리 한국은 가난한 나라입니다.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은 강하지 못했습니다. 세계를 몰랐고 기회를 놓쳤습니다."

1964년 독일에 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호소했다. 예정된 회담 시간을 30분 연장해 호소했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박정희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묻어 있었다. 당시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씨는 박정희의 혼신을 다하는 발언에 통역인 자신이 민망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한국의 나라꼴'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호소로 박정희는 1억4천만마르크의 차관을 얻었고 그 돈을 경제발전에 쏟아 부었다.

박정희를 둘러싼 비판은 많다. 친일파, 독재자, 쿠데타, 지역차별의 원조, 공작정치, 전사회의 군사문화화…. 지은이는 이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지속적으로 주입돼 왔기 때문에 젊은 세대들은 역사상 가장 에너지가 넘치고 역동적이었던 시대를 부패와 권위주의가 점철된 오욕의 역사로 치부하고, 그 시대를 부정하고 희화화하고, 거리를 두려 한다고 분석한다.

지은이는 인간의 삶에 필연적으로 뒤섞일 수밖에 없는 '돌멩이'를 침소봉대해 '보석'을 버리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박 대통령이 경제적으로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에서 실패했다고 말한다. 중화학공업과 유신개혁을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전직 관료들도 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곧 중화학공업화라는 것은 쓰라린 진실이다.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 역시 오원철씨의 회고다.

지은이는 영남위주의 성장정책과 호남 푸대접론 역시 어불성설이라고 말한다. 부산이나 포항 등 영남의 항구도시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는 섬, 도로와 철도의 발달, 깊은 수심 등 공장 입지조건의 유리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수출지향 정책을 내세웠던 60년대와 70년대 미국과 일본과 교역하기 위해서 부산과 남동지역 개발에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중국과 수교가 없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개조하려던 박정희에게 이익집단정치, 지역정치가 안중에 있기나 했을까. 그런 식으로 박정희를 폄훼한다면 박정희의 고향 경북 구미시 상모리에 한국에서 가장 늦은 시기인 1970년대 중반에 전기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이 박정희의 진면목이었다. 명백하고 의도적인 지역차별의 증거가 포착된다면 박정희는 유죄이고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증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친일논란 역시 박정희의 아킬레스건이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관동군 장교를 거쳐, 일본 육사에서 위탁교육을 받았다. 만주지역에서 초급장교로 1년 정도 생활하기도 했다. 지은이는 그러나 이런 이유로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매도한다면 지나치게 단선적인 논리라고 말한다.

식민지 빈농의 집에서 태어난 박정희에게 만주 관동군 장교는 꿈을 키워갈 수 있는 기회였고, 넓은 세계를 욕망하는 청년의 선택이었다. 박정희는 신(神)이 아니라 피가 흐르는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현실에서 더 큰 이상을 꿈꾼 사람인 것이다. 전국적 저항을 무릅쓰고 '한일 국교정상화'를 밀어붙였던 것도 '일본이 좋아서'가 아니라, 배우고 받아들일 것이 있다면 그것이 비록 식민지 지배국의 것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게 박정희의 생각이었다.

(우리나라는 유독 일본과 무역수지에서 적자가 큰 데,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일본의 '기술'을 사서 제품을 만들고, 그 제품을 제3국에 팔아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다. 무역수지 적자가 못마땅하다고 일본과 교역을 끊으면 더 큰 피해를 입는 쪽은 우리나라인 셈이다. 박정희의 한일 국교정상화 역시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지은이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총이 아닌 마음으로 했다'고 주장한다. 박정희 쿠데타군의 숫자가 무척 적었던 점, 쿠데타 기도가 이미 발각됐던 점, 그래서 육군참모총장이 비상을 걸어놓고도 막지 못했던 점, 박정희가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기다리는 진압군 앞에서 연설로 그들을 설득한 점 등은 썩을 대로 썩은 사회가 '혁명'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은이의 의도는 '박정희 미화'가 아니다. 그는 파상적으로 진행돼온 진보학자들의 박정희 비판과 우리 사회의 무지를 향해 '박정희의 맨얼굴을 제대로 알자' 그리고 '이제는 화해하고 앞으로 나가자'고 말하고 있다. 그는 '박정희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지엽말단에 주목해 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격'이라고 평가한다.

지은이 조우석은 충남 출신으로 서강대를 졸업하고 문화일보,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424쪽, 1만6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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