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문화회관 2층 유리 상자에 커다란 나무 인형이 등장했다. 줄에 매달린 인형은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모습이다. 깊은 바닷속에 뛰어들어 무언가를 찾아 손을 뻗고 있다. 남자의 얼굴에 진 주름을 보니 40대는 넘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그 표정은 뭔가를 갈구하고 있다. 세상 만사를 다 살아본 듯한 그 표정이라니. 무엇인가를 돌려달라는 것처럼 애원하고 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하는 얼굴이다. 그 뒤로는 삐뚤삐뚤하게 조각된 나무 의자가 있고, 의자 주변에는 깎아낸 나무 조각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반대편, 손끝이 향하는 곳에는 엉뚱하게 나무 테두리로 둘러싸인 LCD 모니터가 있다.
봉산문화회관 '2009 유리상자-아트 스타'의 여섯번째 작가는 이상헌(44)이다. 11월 29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의 제목은 '기억 잡기'. 허공에 매달린 나무 인형은 본연의 '나'를 기억해내기 위해 순례를 떠난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작가는 단순히 형상을 만들어 놓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인형의 눈 속에는 실시간 전송 카메라가 장치돼 있다. 관객들이 인형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 모습이 바로 LCD 모니터를 통해 나타난다. 주변 환경과 유리 벽면 너머의 관객으로부터 본래 자기 기억을 되찾으려는 나무 인형의 기억 순례 이야기와 관객 소통을 위한 설정. 기억 잡기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전시 기간 중 네 차례에 걸쳐 '메모리 페이퍼'(Memory Paper)라는 제목의 시민참여 행사가 펼쳐진다. 작가가 준비한 A4 용지 크기의 '메모리 페이퍼'에 참여자는 간직하고픈 기억, 잊고픈 기억, 그리고 작품 관람 느낌을 기록해 나무 인형의 몸체 안에 집어넣으면 된다. 이를 통해 작가(나무 인형)는 관객의 구체적인 기억을 수집한다. 이번 작품은 바로 이 같은 관람자 참여를 통해 완성된다. 시민 참여는 31일(오전 10시 30분)과 11월 5, 7, 14일(오후 2시)에 열릴 예정이다.
작가는 "새로운 기억의 침투로 오늘의 기억은 어제의 기억이 되어 심연 저편으로 밀려나고, 나는 '과거'라 이름 지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 떠도는 순례자가 된다. 나는 어제, 오늘 또 내일, 기억들이 떠도는 세상을 여행한다"고 표현했다.
조각에 사용된 재료는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은행나무. 작가는 "은행나무의 이러한 특성은 현대 사회의 냉엄함 속에 삶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평론가 양준호는 "사회 속에 뿌리를 두고 오랜 시간 고민하고 일하며 그 스스로 치유하는 작가의 작업관은 오래된 나무처럼 깊이 있는 내용의 색깔을 가진다"고 평했다. 053)661-3081.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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