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작 영화 리뷰] 시간 여행자의 아내

과거로 돌아가 청춘의 그녀와 다시 결혼할 수 있다면…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만약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허무맹랑하고 실현 불가능한 질문이다. 하지만 물음이 던져진 뒤 한참을 고민했다. 과연 언제쯤으로 돌아가야 할까? 사실 이 물음에는 두 가지 가정이 존재한다. 먼저 현실에 대해 누구나 만족스럽지 못하며, 아울러 그 원인이 과거 어느 시점에 존재할 것이라는 전제다. '지금 현실에서는 네게 닥쳐올 미래를 바꿀 능력과 자신이 없다. 그러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농담삼아 던진 질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넌 지금껏 살아오면서 언제가 가장 좋았니?"라고 물었다면 차라리 답하기 편했으리라. 영화 '시간여행자의 아내'를 본 뒤 잊고 있던 그 질문이 불현듯 떠올랐다. 하나 더 떠오르는 질문.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얼마나 기다릴 수 있습니까?"

◆시간여행자 '헨리'의 이야기

어린 시절 어느 해 크리스마스 이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엄마가 모는 차를 타고 있었다. 노래를 못하는 나에게 엄마는 "네 목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해주었다.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 갑작스레 차가 눈길에서 미끄러졌고, 앞좌석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힌 나는 피를 흘렸다. 그리고 끔찍한 시간 여행이 시작됐다.

오래 앉아있다가 갑자기 일어날 때 어지럼증과 함께 손발이 저려오는 느낌. 시간 여행이 시작되면 바로 그 느낌이 찾아온다. 어느 시간대, 어느 장소에 떨어질 지 알 수 없다. 벌거벗은 몸만 이동하기 때문에 시간을 넘나든 뒤에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옷을 찾는 것이다. 세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그 비밀스런 여행은 평생 나를 따라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시간 여행 끝에 한 시골 마을의 들판에 떨어진다. 고운 눈빛에 조금은 당돌해 보이는 여섯 살 꼬마 숙녀를 만났다. 시간여행자라는 설명에 "증명해 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평생을 기다려주는 사람이 됐다.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시간 여행자를 기다려주는 바로 그 사람.

◆시간 여행자의 아내 '클레어'의 이야기

스무 살,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결국 그 사람을 만나고 말았다. 여섯 살 때 처음 만난 뒤 지금껏 다시 만날 것을 기다려왔던 그 사람 헨리. 첫눈에 그를 알아보았지만 스물 여덟 살의 그는 나를 몰랐다. 아직 그는 여섯 살 때의 나를 만나는 시간 여행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 당연히 나라는 존재를 알 수가 없다. 그 날 밤 설레는 첫 데이트를 하고, 그의 집에 찾아간 나는 들판에서 처음 만난 그 순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헨리와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그는 어머니의 결혼 반지를 건네주며 청혼을 했다.

지금껏 기다려온 사랑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다. 결혼식 준비를 서둘렀다. 술을 마시거나 흥분하면 더 자주 시간 여행을 가기 때문에 나는 행여 헨리가 결혼식 전에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결혼식이 시작되기 직전 시간 여행을 가버리고 마흔 살을 훌쩍 넘긴 헨리가 젊은 그를 대신해 결혼식장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사위될 사람이 갑자기 늙어버린데 깜짝 놀라며 "원래 머리가 희끗했었나"하며 어리둥절해 한다. 하지만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스물 여덟 살의 헨리이건 마흔 살의 헨리이건, 내게는 똑같은 헨리이니까.

행복할 것만 같았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한 번은 사라져 버린 뒤 2주일 만에 돌아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돌아올 수 없었다고 그는 말하지만 나는 기다림에 지쳐간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다른 시간대의 헨리가 나타났다. 옆구리에 총상을 입은 채로.

◆당신은 얼마나 기다리겠습니까?

영화에는 시간대를 건너뛰며 동시대에 두 명이 존재하기도 하는 시간 여행자 헨리와 평생 그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운명을 지닌 아내 클레어가 나온다. 클레어의 시간은 한 방향이다. 거스름도 없고 미래로 건너뜀도 없다. 하지만 헨리는 종횡무진이다. 언제 어느 시간대로 떨어질 지 모른다. 짧은 시간에 다시 돌아올 수도 있지만 언제 돌아올 지 모른 채 한참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평생을 기다리는 숙명의 여인 클레어. 삶을 선택할 수도, 미래 운명을 알 수도 없는 우리의 모습이다. 때로 우리는 삶에 지치고, 의지를 거스르는 운명의 야속함에 분노하고 눈물 짓기도 한다. 영화는 극적 연출을 통해 억지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두 사람의 삶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런데도 눈물이 난다. 미래를 알지만 바꿀 수 없는 무기력함에 눈물이 나고, 한 여인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어린 시절의 순수한 만남과 그 기다림의 순결함 때문에 눈물이 난다. 마지막에 헨리가 총상을 입게 된 이유를 통해 우리는 시간과 운명이 그저 흘러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닌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반복됨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사실 무한 반복은 영원함과 같은 말일 뿐이다. 아울러 영원함은 순간의 덧없음과도 일맥상통한다. 영원히 함께하는 것은 결코 인식할 수 없다. 순간순간의 사라짐을 통해 늘 곁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을 때 존재 자체를 알게 된다. 없어진 뒤에야 소중함을 안다고 할까. 이 때문에 어느 순간 사라지는 헨리는 클레어에게 영원히 존재하는 사랑임을 깨닫게 해주는 암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오드리 니페네거의 2003년 작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원작 소설은 출판과 동시에 뉴욕 타임스 7주간 1위, 워싱턴 포스트의 찬사와 함께 세계적으로 500만부가 팔렸다. 영화 '트로이'의 매력남 에릭 바나가 시간 여행자 헨리 역을 맡았고, '노트북'의 주인공 레이첼 맥아덤즈가 시간 여행자의 아내 클레어 역을 맡았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브래드 피트가 직접 제작에 참여했고, 판타지 멜로물의 고전으로 꼽히는 '사랑과 영혼'의 작가 조엘 루빈이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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