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었다. 제주 올레길에도 가을이 그득하다. 낮은 처마를 맞대고 앉은 작은 마을 사이로 들꽃이 무리지어 반기는 작은 길이 이어진다. 오름의 억새가 바람결에 춤을 춘다. 검은 빛깔의 용암과 푸른 바다가 있는 올레길에 사람이 몰려든다. 걷기 위해서다. 그냥 걷는다. 조급함이나 긴장감이 없다. 바다의 원시성이 생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일깨운다. 석양의 바닷가에 선다. 저무는 해가 처연하게 아름답다. 마을 구멍가게에 들어가 어묵을 사먹으며 할머니와 사는 이야기도 나눈다. 하루에 대여섯 시간을 걸으며 살아온 길을 되돌아본다. 무에 그리 바쁘게 살았던가. 제주 올레길에는 사람과 들꽃과 바다가 함께한다.
지리산 둘레길의 출발점인 매동마을. 민박집들은 이쁜이네, 고사리할머니, 호두나무집 등의 예쁜 이름으로 문패를 달았다. 감나무에 매달린 홍시 몇 개가 파란 하늘과 대비되며 선명하다. 논배미는 기막힌 색채와 조형미의 설치 미술품이다. 된장찌개와 깻잎장아찌, 무생채로 밥상을 차려준다. 밥맛이 달다. 매동마을은 과거와 현재가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숨가쁘게 달려와 쥐어주는 고구마 한 봉지. 정직한 노동, 깜깜한 밤, 느릿한 시간을 맛본다. 도시인들은 매동마을의 자연과 인심을 가득 안고 돌아간다.
서울 친구가 난생처음 대구에 왔다. 그에게 좀 근사한 대구를 보여주고 싶었다. 경상감영공원, 신천, 동인 찜갈비 등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난감했다. 팔공산으로 올라가 사찰 음식을 먹고, 케이블카를 탔다. 골목길 문화 투어가 시민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길은 길이되 이야기가 있는 길이다. 대구 경북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길을 찾아내고, 의미 있는 공간으로 가꾸어 가야 하리. 지역마다 문화라는 간판을 내걸고 안간힘을 쓴다. 묵은 옛길에 담긴 시간의 의미가 공간을 되살려준다. 비슬산 자락에, 팔공산 둘레에 올레길을 만들어 보자.
길은 여러 갈래이다. 그동안 우리는 고속도로만 달려왔다. 효율성과 경제성을 따지며 모두가 한 길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속도만을 앞세운 그 길에는 나무도 마을도 들꽃도 보이지 않았다. 더 넓은 아파트, 더 큰 차를 욕망하면서 살다 보니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근대의 합리성과 자본의 풍요가 많은 길을 봉쇄해 버렸다. 어느 날, 이 길만이 있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길을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그 길은 구불구불하다. 똑같은 길은 없다. 좁다란 길마다 산국이 피어나고, 메뚜기도 날아다닌다. 작고 소박한 길, 우리가 열어볼 만한 또 다른 길이 아니겠는가.
이경희 대구 달서여성인력개발센터 강사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