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6·25전쟁으로 난리통이었던 대구. 그곳에 클래식 음악을 사랑한 스물다섯살의 한 청년이 있었다. 대구역전의 음향기기사 종업원이던 청년은 LP판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에 끌려 음악 동호회를 조직하고, 음악감상실을 열었다. 이중섭, 양주동, 유치환 등 피란 문학예술인들이 그곳을 다녀갔고, 청년은 그들을 위해 차를 끓이고, LP판을 틀었다. 그리고 60여년이 흘렀다. 이제 구순의 할아버지가 된 청년은 오늘도 버스를 타고 음악감상실로 출근한다. 감상실은 그의 나이만큼이나 늙어버렸다. 손님 한 명 안 찾는 날이 더 많아졌지만, 그는 여전히 감상실 뒤쪽 그 자리에서 레코드 판을 돌리고 있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이 사연의 주인공은 대구 최초의 음악감상실 '녹향'(綠鄕·중구 화전동·구 대구극장 앞)을 운영하고 있는 이창수(90)옹. 그를 위해 대구경북의 현역 지휘자들과 클래식 동호인들이 뜻깊은 음악 기부행사를 준비하고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한 한 음악 동호인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클래식이라는 장르를 떠나 한 인간의 순수한 열정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유명 지휘자들이 흔쾌히 노개런티로 참가를 수락해줬다"고 전했다.
'마에스트로, 녹향으로 가다'는 부제의 이번 행사는 17~21일 오후 7시 30분부터 5명의 지휘자가 강연자로 참석, 90분가량 관객들과 함께 음악을 듣고 감상평을 나누거나, 지휘나 클래식 전반에 대한 궁금증을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17일 이현세 경북도립교향악단 지휘자를 시작으로 이일구 김천시립교향악단 지휘자(18일), 이재준 대구영재예술교육원 음악감독(19일), 박지운 대구시립오페라단 음악기획 겸 지휘자(20일), 곽승 대구시립교향악단 지휘자(21일)가 차례로 참여한다. 첼리스트 박경숙씨가 진행자로 참가한다.
아련한 추억은 지휘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일구씨는 "대학(79학번·영남대 피아노 전공) 다닐 때 친구들과 녹향에서 음악을 듣고 토론을 하던 향수가 있다"며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녹향이 늘 안타까웠는데, 이런 자리가 마련돼 반갑다"고 했다. 곽승씨는 "젊은 시절 음악감상실에서 괜히 심각한 척하며 음악을 듣던 시절이 있었다"며 "클래식 음악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행사가 소중한 자리이고, 지휘와 음악에 대해 격의없이 청중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이창수옹은 "클래식 애호가들이 줄어들고 최근에 아내(88)마저 병으로 몸져 누웠지만 이런 뜻밖의 선물을 받게 돼 기쁜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며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녹향의 문이 열려 있을 것"이라고 했다. 행사 문의 053)621-3301.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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