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 기쁨과 슬픔의 천칭 저울

"선생님은 80평생을 살아오시면서 기쁜 일과 슬픈 일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많았습니까?" 수년 전, 병환에 누운 한 노(老) 시인을 방문한 자리에서 내가 위문의 말은 하지 않고 무례하게 이딴 것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상당한 문학적 영광을 누렸던 노 시인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뜻밖의 말씀을 하였다.

"글쎄, 내게는 비슷했던 거 같아요. 기뻤던 일과 슬펐던 사건을 각기 천칭 저울에 올려놓으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거의 균형을 이루었지 않았겠나 싶군요."

그 말을 듣자 나는 왠지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가 들고 있는 천칭 저울에 기쁨과 슬픔이 나란히 얹혀있는 장면을 상상하였다.

시인의 말처럼 한 사람이 일생을 통해 겪는 기쁨과 슬픔의 무게는 거의 같을지 모른다. 만일 둘 중에서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크다면 어떻게 될까? 진화론적인 측면으로 따지자면 현재의 인류는 오랜 옛날보다 훨씬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으로 차 있을 게 아닌가. 그러나 수천 년 전 인류가 지금보다 더 괴로웠다는(즐거웠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옛 선인들은 호사다마(好事多魔)나 호몽부장(好夢不長), 혹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이야기를 하며 기쁜 일과 괴로운 일이 손등과 손바닥처럼 서로 붙어있음을 강조한다. 우리 속담에 장미에도 가시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기쁨과 슬픔이 붙어 있음은 한 개인만 아니라 지구라는 단위에서도 유사할 것이다. 풍요로운 지역이 있는 반면, 걸핏하면 지진으로 땅이 뒤집어지는 곳도 있다. 한쪽은 축구장에서 우레 같은 함성이 일어나지만 다른 한쪽에선 기근으로 굶주려 죽거나 전쟁에 치인 아이들이 해골처럼 돌아다닌다. 지구 전체에도 기쁨과 슬픔의 분량이 거의 맞먹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놀드 토인비가 말한 자연의 도전에 맞서는 인간의 응전이나 경기의 순환을 설명하는 '콘드라티예프 파동'(kondratiev cycles)도 결국 환희와 고통의 끝없는 반복을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올 들어 멕시코와 미국에서 처음 발견된 신종플루가 전 지구를 휘청거리게 한다. 이미 세계보건기구는 신종플루로 사망한 이가 5천명을 넘어섰고 앞으로 겨울이 닥치면 감염자가 20억 명에 달할 것이라 예상한다. 상승하던 세계경제지표가 흔들리고 세계도처의 축제장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아름다운 지구라는 '장미'에 가시가 돋은 셈이다.

신종플루는 어느새 우리의 안방까지 기습하여 너나없이 불안하다. 내 주변만 해도 벌써 열 명이나 가깝게 신종플루가 다녀갔거나 현재 앓고 있다. 이만하면 지구의 가시가 모든 개인들한테까지 날아들고 있다고 할 만한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도 이번 주 안에 전염병의 최고 경보단계를 선포할 예정이라 한다. 의료계는 백신 생산과 환자 투여에 진력을 다할 것이고, 관계기관은 가장 위력적은 방역체계를 구성해서 대처하리라고 우리는 믿을 도리밖에 없다.

문제는 각각의 개인들이다. 모든 질병과 그로 인한 슬픔은 개인에게 수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름답게 물든 단풍을 즐기느라 여행지에 갔다가 귀가하는 도중에 남편의 이마에 열이 치솟거나, 수능을 코앞에 두고 불길한 징후를 보이는 고3 아이 앞에서 부모는 아연실색한다. 이렇듯 지구 어느 모퉁이로부터 날아든 질병의 화살은 기어코 우리들 개인에게로 와서 꽂히는 것이다. 개인은 전염병을 앓는 갑자기 허약해진 지구와 그로 인해 흐트러지고 마비되는 자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앞에서 노 시인이 말한 것을 다시 떠올린다. 노 시인은 일생 동안 기쁨과 슬픔의 분량이 왜 비슷하다고 했을까. 그는 왜 굳이 천칭 저울이라는 비유로써, 기쁨과 슬픔의 양자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을까. 그것은 우리의 불가피한 삶의 형태라기보다 역경을 이겨내는 올바른 삶의 태도가 어떤 것임을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성(聖) 바울은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쳤으면서도 도리어 자신의 몸은 치유하기 힘든 병을 앓았다. 바울은 그 병을 자신의 육체에 박힌 '가시'라 칭하며 병으로 인해 자신이 교만하지 않게 되었다는 유명한 고백을 했다. 지구의 한모퉁이에서 날아든 저 날카로운 병균도 어쩌면 지구의 '가시'인지 모른다. 지구는 단지 풍요함만으로 이루어져있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편리와 수월함을 누리며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삶은 기습적인 곤경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 개인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건지 모른다.

엄창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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