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페이건 지음/남경태 옮김(예지, 2004)
단풍의 교태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기온이 돌연 영하로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미 예고된 날씨 변화이긴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변신한 사람들의 모양새가 가관입니다. 두꺼운 외투와 털모자, 마스크와 장갑까지 갖추었습니다. 긴 부츠에 가죽털옷, 한겨울 복장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미처 겨울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대비책을 세웠습니다. 가을옷을 겹겹이 껴입고 스카프를 둘러 중무장을 했습니다. 마치 전쟁에 임하는 전투병과 같은 신속하고 일사불란한 행동입니다. 거리 풍경도 바뀌었습니다. 붕어빵 행상들의 수가 눈에 띄게 늘었고, 어묵을 삶는 노점상들의 손길이 바빠졌습니다. 정서도 변했습니다. 노란 은행잎의 가을 흥취가 하루아침에 누렇게 마른 겨울 쓰레기로 변해버렸습니다. 귀찮은 듯 낙엽더미를 쓸고 있는 청소부, 빠른 걸음의 행인, 소소한 가을바람에 황급히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 그들에게 이미 가을은 잊혀진 계절입니다.
기온 강하, 너무나 빠르고 획일적으로 사람들을 변화시켜 버렸습니다. 나름대로 똑똑하고, 나름대로 가졌고, 나름대로 고집이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정치도 법도 도덕도 하지 못하는 일을 날씨가 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연의 종속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고고학과 인류학의 권위자인 브라이언 페이건(Brian Fagan) 교수의 저서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예지, 2004)를 보면 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책의 내용에는 로마제국을 흥하게 한 것도 멸망하게 한 것도 기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고 팽창을 지속하게 된 시기는 유럽의 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를 가름하는 추이대가 북상하는 시기와 일치했습니다. 그 때문에 유럽 속주에서 식량의 자급과 로마 주둔군을 위한 곡물의 대량 생산이 가능했습니다. 3세기 이후 로마제국의 쇠락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후 조건이 변화되어 지중해성 기후대가 남쪽으로 물러가면서 프랑크족과 고트족이 갈리아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서유럽의 날씨는 더 추워지고 습해졌으며, 갈리아에서의 곡물 대량 생산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의 경계가 다시 북아프리카로 내려가자 나일강변에도 얼음이 얼었습니다. 기후가 변하자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농업이 혼란에 빠지고 군대와 도시 시장이 사라지고 밭이 텅 비게 되었습니다. 좌절한 농부들은 자급자족농경으로 회귀했고, 도시 인구를 먹여살릴 부담이 없어지자 집약도가 약해져서 경작하기 좋은 땅만 경작하게 되었습니다. 소의 몸집까지 작아졌습니다. 확고한 농업 기반이 사라지자 갈리아 속주들은 외부의 침략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곡식으로 충성을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추이대의 변화는 또 다른 자연 재해를 가져왔습니다. 대규모의 화산 폭발이 일어나면서 역사상 가장 심하고 오래 지속된 건무(乾霧)를 가져왔습니다.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의 말처럼 "1년 내내 태양은 마치 달처럼 희미한 빛을 발할 뿐 열기를 주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흉작이 잇달았고, 기근, 굶주림, 전염병이 덮쳤습니다. 마치 사스가 창궐하여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던 2003년의 중국 상황과도 흡사한 이야기입니다. 한랭하고 음습한 기운이 가득했던 지난 여름 이후 신종플루의 공격을 받고 있는 지금 우리의 상황과도 유사합니다. 결국 수천년 인간 역사를 반추해 보면 궁극적으로 기후에 대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기껏해야 옷을 두껍게 입고 불을 피우는 정도입니다. 인간은 그냥 자연의 일부분인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가 신종플루 극복에서 기대하는 것도 사실 기후입니다. 겨울의 길목에서, 극도의 추위나 강렬한 햇빛이 신종플루를 소멸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해 봅니다. 경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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